무제(無題) / 김진학
역삼역 플랫폼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지하철 계단을 미처 오르기도 전에
또 다른 기차는 칸마다 만삭의 몸을 풀며
사람들을 순산한다
탁탁한 터널의 공기를 털며 햇살을 향한다
오래된 기억 속을 날고 있는 나는
까마득한 빌딩사이를 걸으며
낡은 양철지붕성당의 삼종소리와
잔별이 수없이 굴러다니던 하늘에서
가끔씩 떨어지던 별똥별의 노래를 듣는다
가장 깨끗한 산에서 불던 바람이 길을 잃고
낯선 빌딩에 괜히 부딪치고 사라진다
어두워지면 술병 따는 소리로 요란한 거리엔
몇 명은 비틀거리며 하루를 토하고
몇 명은 지폐 몇 장에 치마를 내리는
홍등가 여성을 따라 나서며
삶의 십자가를 쾌락에 내려놓을 것이다
그건 슬픈 일이다
그래도 밤은 어둡지만은 않다
아직도 낡은 성당에서는 삼종소리와
저녁미사의 봉헌송이 들릴 것이고
흐릿한 백열등 아래에서 동화책을 읽다
잠든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손엔 묵주를 든 할머니가 있는
판잣집도 있을 것이다
300원짜리 커피 맛이 향기롭다
신이 난 바람도 이젠
아는 척 볼을 치며 달아난다
고개를 든다
누가 미는 듯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 저만치
하늘엔 구름 몇 점이
계절의 여왕과 축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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