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힘
일기는 매일매일 기록하는 자신만의 이야기이다. 지극히 일상
적이고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이 일기가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적
인 고전이 되기도 한다. 스위스의 철학자 헨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Henri Frederic Amiel이 평생에 걸쳐 쓴 일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인데,
그는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해서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일기는 고독한 사람의 위안이자 치유이다. 날마다 기록되는 이 독백
은 기도이면서서 영혼과 내면 그리고 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혼
란스러운 나에게 평화를 준다. 일기를 쓰는 것은 펜을 든 명상이다.
그의 일기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기독교적인 주제에 비중을 두
면서도 19세기 중후반의 유럽 사회의 풍속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지 엄연한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1만 7,000페이지에 달
하는 그의 일기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편집 · 출반 되었
고, 《아미엘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이렇듯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예술작품을 만든 일기가 있는
가 하면, 치열한 전쟁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긴 이순신 장군의 <난
중일기>, 우리나라 기록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선왕실의 <승정
원일기>와 같은 우리의 고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김구의 <백
범일지>는 한 개인의 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근대사의 좌충우돌
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기록해놓은 명저이다. 고은 시인은 이 책을
보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는 독서평을 남긴 바 있다.
젊은이들의 우상인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남미의 정글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적에게 체포되기 바로 전날까지 일
기를 계속해서 썼다. 그 일기는《볼리비안 다이어리Bolivian Diary》로
얼마 전 미국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게바라는 일기를 통해서,
화약 냄새 나는 오늘을 성찰하고 아름다운 내일을 전망하고 있었다.
일기의 대부분은 시시각각 변화는 전투상황과 적의 동향을 기록하
고 있지만 군데군데 아래와 같은 개인적인 연민의 구절도 있다.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늘 나로 인해 두 손 모아 기도하시
는 어머니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 아프다. 우리는 언제쯤 꽃
처럼 환하게 만날 수 있을까.'
이 일기는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67년 6월 21일의 기록
이다.
자, 이제 다시 우리들의 일기로 돌아와 보자. 일기는 평범한 우
리들만의 작품이자 또 비밀창고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아무에
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쓰기 때문에 자아를 최대한
정직하게 드러내는 장소이다. 그런데 일기마저도 나중에 공개될
것을 예상하고 조작한다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 날아가 쉴 수 있을까 싶다. 그에겐 죽음조차
도 조작된 그 어떤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쪼그라드는 항아리
속의 마녀 할머니처럼.
이제부터라도 작은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준비하자. 10대
라도, 아니 50대, 60대라도 상관없다. 일기를 쓰다 보면 어느 날 문
득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 다시 찾아와, 당신에게 삶의
기쁨을 던져줄 것이다.
친구들의 고민을 자기 일처럼 잘 들어주고 나름대로 조언도
잘 해주는 한 여자가 있었다. 항상 어려운 상담 역할을 유연하게
해내는 그녀를 친구들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유복한 집안에
서 별 걱정 없이 잘 자란 것 같은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청소년 시
기에 심한 방황을 한 적이 있다. 그 자리는 가까운 사람끼리 와인
바에 모여 어울리는 자리였는데,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방황했던 기억을 꺼내놓았
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으로 내게 짧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건 바
로 "너 일기 쓰니?"라는 물음이었다.
나는 '가끔씩'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언제 마지막으로 일기를
썼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물론 사춘기 때에는 비밀 일기
를 자주 쓰곤 했던 소녀였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사는 일이 바쁘
다 보니 일기는 어느새 멀어져버렸다.
그녀는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무사히 건너게 해준 것이 다름 아닌 일기였다고 단정했다.
이제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는
그녀. 현재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 당당함의 뿌리가 바로 일기
였다는 생각을 하자, 문득 '일기의 어떤 면이 너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
답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하루에 몇 분이라도 조용히 일기장
과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거울처럼 나의 모습이 떠올랐어. 거기에
는 내가 화내는 모습,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모습, 가끔은 자랑
스러운 모습도 있었지. 그걸 있는 그대로 적는다는 것은 일종의 훈
련이더라고. 생각은 나긴 해도, 그걸 잘 정리하는 거 쉽지 않잖아.
아무리 나 혼자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고
치면서 나의 모습을 확실히 그리려고 하자, 거기에서 참는 습관이
저절로 생기더라. 그렇게 매일매일 일기를 쓰다 보니까, 약간의 말
썽을 부린 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큰 실수 안 하고 사춘기를 지
날 수 있었어."
그리고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친구나 선후배들에게 조금이
나마 위안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것도 다 그때의 일기 쓰는 버
릇 때문이었고 덧붙였다. 사람 사는 모습은 의외로 비슷해서, 그들
의 고민이 바로 자신의 고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그 친구가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내 이런 생각을 전하자 그녀는 '그건 또 다른 일'이라면서 이내 손
사래를 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감동을 받은 작품들, 그림이나 음악, 문학작
품도 그 작가의 혼이 배어 있는 것인데, 그것의 시작이 바로 일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알게 모르게 시중에 나와 있는 출
판물 중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일기를 책으로 내놓은 것이 무척 많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2의 사춘기라서 그런지, 친구들 모두 서른을 넘기자 이런저런
고민들로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런 그들에게 일기를 한번 쓰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해주고 싶은 마
음이 친구와 헤어지면서 들었다.
일기는 독서등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어둠 속에서 책을 읽기
위해 독서등을 켜듯이, 하루 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나만의 마음을
밝혀주는 일기. 오늘만이라도 그 친구와 이야기 나누었던 것을 일
기장에 적어볼까 다짐하면서 나는 집으로 향했다.
"손 좀 쫙 펴봐, 엄마처럼. ······이제 네 손바닥을 깨물어
봐."
때를 부리는 딸아이에게 몽골의 한 어머니가 아이의 손바닥을
펴게 하고 깨물어보라고 한다. 아이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손바
닥을 깨물려고 하지만 그게 되는가.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딸에
게 말한다.
"사람이 살면서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는 법이야. 갖고 싶은 게
아무리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해도 말이야."
몽골 출신 영화감독 비얌바수렌 디바가 언젠가 보았던, 한 지혜
로운 여자에 대한 실화이다.
출처 : 착한 책(원재훈 지음)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무좋은 당신 (0) | 2011.04.23 |
---|---|
아름다운 사랑으로 꽃피게 하소서 (0) | 2011.04.22 |
마음을 비우면 편안해 진다 (0) | 2011.04.20 |
세상 모든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0) | 2011.04.19 |
고치고, 지우고, 다듬고······삶도 그렇게 할 수 있다 (0) | 2011.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