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신과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종이어서 신종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글귀다. 신라 예술가들이 만
든 이 종에 '신과 함께 만든 것'이라고 굳이 적어놓은 이유는 무엇
일까? 이러한 종을 만드는 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경외감의 표현이다. 마치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신이여
이 영화를 과연 제가 만든 것입니까?"라고 감탄했듯이.
전문가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종들 중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가
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는다. 이 종은 신라의 경덕왕이 아버
지 성덕왕의 위엄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는데, 번번이 실패
를 하다 경덕왕 생전에는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인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했다. 제작하는 데 20년이 걸린 이 종의 양면에는
1,000여 자의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문장들은 종을 만든 목적과 종
제작에 참여한 후원자와 장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록인데, 글의
첫머리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종을 만드는 첫째 목적은, 이 종을 쳐서 나는 소리는 이 우
주에 절대적 진리의 소리여서 이를 듣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깨
닫게 하려는 데 있다.'
이 종소리는 깨달음을 전하는 신의 음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
을 치는 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그 연꽃을 침으로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연꽃은 불가에서 깨달음의 상징이기에, 종에 새겨진
연꽃에서 소리가 퍼져나가고, 그것을 듣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온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목적이었다. 이 신라의 종에는 절
대적 진리를 향한 간절한 인간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실제로 이 신종 소리는 새벽 산속에서는 사방 백 리까지 종소리
가 퍼져나간다고 한다. 어설픈 기술로는 흉내낼 수 없는 신묘한 소
리가 난다. 신라인들이 이 종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던 것
은 인간의 혼을 흔드는 진정한 예술작품만이 영원성을 지닌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구례 화엄사의 일주문을 지나치자, 나의 온몸은 석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붕 떠올랐다. 사찰에서 복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소리처럼 들려오는 북소리는 붉은 기운을 퍼
뜨리고 있었다. 그 북소리는 저녁놀에까지 다가가고, 나는 취한 듯
이 그 소리를 좇아 올라갔다.
대웅전 오른쪽을 마주보고 있는 누각에서 둥둥둥 북소리가 울
려 퍼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속세의 모든 인연이 끊어져버리고,
다만 그 애잔한 감정이 저녁 햇살에 녹아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
는 내 가슴이 저 북소리에 무참히 두들겨 맞아 퍼렇게 멍들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그렇게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본 화엄사의 숲속은 하염없이 깊어 보였다.
그때 숲속에서 걸어 나온 신록의 영혼들이 사각사각 다가오고,
그 발자국은 저녁 빛이 되어 사찰의 창호지 문을 물들이면서 처연
하게 빛났다. 관광객들의 화려한 등산복도 그 빛을 잃어가고, 사방
은 돌덩어리처럼 고요해지고 있었다.
생각을 멈추면 돌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잠시 후 그 북소리
가 멈추자 범종각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은 어떤
목소리인가, 누구의 목소리인가. 소리는 퍼져 나가다가 내 앞에서
연꽃처럼 피어났다.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꼭 꽃잎 한 장의 거리
를 두고 종소리는 머물고 있었다. 손을 뻗어 잡는다면, 순간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종소리에 물었다.
"거기 서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종소리는 점점 멀어지면서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또다시 물었다.
"거기 당신은 왜 그리 아름답습니까?"
그러자 화엄사 각황전 옆에 피어 있는 여름 꽃들이 종소리에 흔
들렸다.
때론 눈에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그런 것
들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바라본 사람의 마음에 한 결을 남기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결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종소리에 작은 깨달음을 얻어 고마운 마음으로 대웅 전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러자 나의 눈에 내 발등이 보였다. 그리고 땅이 보
이고, 개미가 보이고, 작은 돌멩이가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종소
리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취였다. 종소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잠시
나마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곧 어둠이 올 것이다. 나는 천천히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시간이 있었다. 그 적막강산같이 고
독하고 외로운 시간이 지나가면, 종소리처럼 들려오는 소식이 있
고, 북소리처럼 들려오는 소식도 있고, 때론 천둥소리처럼 들려오
는 소식도 있다. 오늘 당신에게 들려온 새로운 소식은 어떤 소리를
품고 있었는가?
출처 : 착한 책(원재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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