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모
내게 한 분 계신 고모님은 나와 참 가까운 사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더욱더 가까워져 마치 엄마와 딸같이 가깝게 지낸다. 올해로 연세가 85세이신데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평소에도 여기저기 아픈 데가 참 많다. 게다가 작년에는 일 년 내내 혹시나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로 잘 잡숫지도 못하고 거동도 불편할 정도로 편찮으셨다. 딱히 무슨 병명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기력이 쇠잔한 거처럼 치료도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게 참으로 힘든 일인데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이번에 비행시간만 12시간이나 되는 한국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오셨다 가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오실 때나 가실 때나 여독 한 번 앓지 않고 거뜬히 다녀가신 것이다. 놀라운 저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카 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커서라고 해야 하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2년 만에 만난 고모님의 상태를 보고 탈 없이 와주셔서 고맙고 반가웠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세월은 거스를 수가 없는지 몸과 마음이 모두 많이 약해지신 것이 눈에 여실히 띄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여장부 같고 매사에 자신이 있으며 사리판단이 뚜렷했던 그 고모님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약하디약한 노인네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고모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절대로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는 거 같은데 말이다.
손이 귀한 풍족한 집안의 막내이자 외동딸로 자라 아쉬울 것 하나 없었던 처녀 시절은 결혼하면서 편안한 삶과는 이별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집은 좀 기울지만, 동네에서 유일하게 군청에 다니는 총각을 점 찍은 아버지의 권유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싫단 말도 못하고 혼인을 하게 된 것이었다.
객지로 직장을 옮긴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서 산후 조리를 하며 살림을 정리하고 있던 고모한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사이에 그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직장 근처에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사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는 일시적인 것일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첩이 다 그럴까 마는 그 여자는 심성이 아주 독한 사람이었던 거 같다. 절대로 본가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 아니고 하루빨리 이혼하라고 매일 성화를 댔다고 한다. 어쩌다 집안 일로 본가에 들려도 일만 보고는 바로 떠나가는 남편을 보며 양갓집 규수는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고 바가지 한 번 긁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문중 일로 집에 들른 남편이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고는 그만 집에서 자고 가게 된 것이었다. 이때 생긴 아이가 바로 집안의 장자가 된 것이니 하늘의 보살핌이었을까? 고모의 임신 소식을 들은 첩의 강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먼저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 큰소리치며 고모를 내쫓으려고 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
그때부터는 남편 단속이 더 심해지고 강짜는 더 심해졌다. 그래서 본가에 일이 있어도 대신 사람을 보내 시킬 정도였다. 얼마나 지독한 사람이었는지 지금도 내 어린 기억 속에 그 모습이 생생하다. 우리 집까지 수시로 찾아와 칼을 들이대며 이혼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욕을 해대던 모습이 말이다. 그때 곁에서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앉아 이혼을 애걸하던 고모부의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다시는 이 남자를 고모부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행패와 온갖 수모를 다 견디면서 꿋꿋하게 혼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 오던 고모님이다. 고종사촌들이 학교 다닐 때는 시간을 맞춰야 하는 등록금 철에도 일전 한 푼의 도움도 없었다. 하지만 그쪽의 1남 2녀는 외국 유학까지 하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호의호식하며 키웠다.
그러나 고모부가 덜컥 병이나 병원에 입원하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병원비 물고 병구완하는 건 고모와 고모의 두 자식이었다. 왜 인제 와서 그런 걸 다 해야 하느냐고 고모한테 불만을 말했지만, 사람이란 게 그런 게 아니란다 하시면서 힘들어도 마다치 않으셨다. 난 참말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상식으로는 그냥 죽든 말든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나였으면 고거 쌤통이라고 쾌재를 불렀을 거 같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그쪽의 호사스럽게 큰 자식들과 평생 호의호식하던 첩은 가끔 코빼기만 비치고는 후다닥 사라져 버리기가 일수였다. 딸들은 시집에서도 모르는 첩의 자식이라는 게 들통이 날까 봐 아예 경계를 철저히 했고 첩은 몸이 약해서 힘든 일은 할 수 없다고 발뺌을 했다. 이렇게 평생을 돌봐 온 가족한테서 처절하게 버림받은 남자는 결국 60년을 버려두었던 가족들의 간호를 받다가 용서를 빌며 아들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힘든 일은 해 본 적 없이 곱게 자란 외동딸이라고 해도 자식 둘을 둔 엄마는 참으로 강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살림을 꾸리기 위해서 할 줄도 모르는 장사를 시작하고 온갖 고생을 마다치 않고 두 아이를 반듯하게 키웠다. 그뿐이 아니라 서울 종로 한복판에 커다란 집도 장만하는 억척을 부려가면서 참 열심히 사셨다. 아이들이 장성해 출가를 시키고 집안 형편도 안정되어 이젠 편하게 사실만도 한데 최근까지도 용돈을 스스로 벌기 위해서 규모를 줄여 꾸준히 장사를 계속하셨다. 남에게 아니 자녀들에게까지도 도와는 줄망정 신세 지는 것이 싫다며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살아가시고 계신 분이시다.
오랜 고생으로 몸이 망가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을 건강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챙기시는 일에는 아주 열심이셨다. 하지만 1년 전 고모부 병간호를 하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볼 새가 없어 그만 급격히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예전 같으면 잘 잡숫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고만이었을 테지만 연로하시니 회복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이번에 뵌 고모님은 전에 뵈었던 고모님이 아니셨다. 마음도 많이 약해지고 몸은 더욱더 힘이 없어져서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 넘어지시기를 밥 먹듯 하신다. 그래서 큰 걱정이다. 그리고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곧 잊어버리신다. 그러고 보니 늘씬하고 훌쩍 키가 크셨던 고모님의 키도 더 작아지고 왜소해지신 거 같다. 그것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도 그리고 사촌들도 이제는 옛 모습보다는 현재의 모습에 적응해야 할 텐데 아직도 예전의 강한 이미지에 매달려 있으니 그런 약한 모습을 보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때로는 짜증도 난다, 대체 왜 그러신 거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모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시간의 흐름이 불현듯 무서워진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갈 때 옛날과 같은 모습을 기대했든 아니 그러기를 바랬든 내가 욕심이 너무 과했을까? 이번에 뵌 약해진 고모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고모는 사시는 날까지 내 기억 속에 있는 씩씩한 모습 그대로 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거 같다. 그리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가능한 한 자주 뵙고 외로움도 덜어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나 앞으로 나를 몰라보는 때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마음 한편에 있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한국에 자주 가게 될 거 같다. 고모님을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래야만 돌아가신 후에라도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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