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크리스마스 불루

doggya 2021. 1. 24. 03:40

크리스마스 불루

 

세상이 즐거워해야 크리스마스가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엉망이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나에게는 서글픈 날이 되어 버렸다.

 

지난 8월에 집에서 넘어져 관절이 부러지신 고모님 때문이다. 그때가 마침 의사들의 스트라이크로 인해서 입원환자는 물론이고 수술도 받을 수가 없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고통 중에 집에서 며칠을 계시다가 고통이 심해지자 결국엔 환자는 받을 수가 없다는 병원엘 억지로 밀고 들어가 입원을 하셨다. 그러나 곧바로 수술을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무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붓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수술하기로 하였다. 그래 저래 며칠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수술을 받으셨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퇴원해서 재활을 있는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억지로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아픔을 참지 못하고 재활 치료사를 꼬집기도 하고 밀쳐 내기도 하여 재활치료를 어렵게 만드셨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마땅한 재활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고모는 치매 환자였던 것이다.

 

우리 고모라는 제목으로 많은 고모의 일생에 대해서 수필을 적이 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고도 꿋꿋하게 견디어 주신 고모가 자랑스럽고 그렇게 오래 살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6 전쯤 미국에 다녀가셨는데 그때 이상한 느끼게 되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버력 내시고 화의 도는 고모의 일생을 통해 보지 못하던 것이었기에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리 주의 깊게 관찰을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낯설기만 했던 행동들이 이해됐던 그다음에 내가 한국을 찾았을 때였다

 

그다음부터 자주 고모를 찾아 뵙겠다고 했던 것이 같은 한국의 이웃동네도 아니고 맘대로 되지 않았다. 가지 못할 때는 자주 전화를 드려 안부를 묻곤 했었다.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고 기억을 조금씩 잃어 가고 계셨던 것이었기에 나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어릴 년을 키워 주셨고 나를 보면 돌아가신, 유난히 의가 좋았던 오빠 생각이 나서 나를 친자식처럼 여기고 우리 딸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시곤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전화를 때는 내가 미국에서 전화한다는 것도 기억하시고 먼데서 전화를 했냐며 반갑게 대답을 주셔서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기억을 잃지 말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없는 바람이었던 가보다.

 

전에 어느 영화의 제목이 생각난다. 머릿속의 지우개. 처음 단어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말의 무얼 뜻하는지를 알았다. 머릿속에서 기억이라는 부분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가는 . 그런데 요즘에는 단어가 전혀 생소하지가 않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소중한 기억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사람은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겠지만 그건 지우고 싶을 뿐이지 정말로 지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봄에 한국에 가려던 계획이 취소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고모는 한번 죽기 전에 다녀 가라는 말씀만을 전화할 때마다 되풀이 하셨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금방 돌아가시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말씀이 마음에 걸렸다. 알았던 코로나 사태가 1년을 훌쩍 넘어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러던 중에 계단에서 넘어져 대퇴부가 부러지게 것이었다. 사고를 시점으로 기억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버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성격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어떤 일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 버려 가고 있었다.  심지어 음식을 씹는 조차 기억을 못하시는 했다. 그러면서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완전히 치매 환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사촌들이 내가 마음이 아플까 전화를 바꿔주면서도 그저 당시에 상태가 좋아 그런 거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장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병원에선 퇴원을 종용하고 퇴원을 하기 위해서는 재활원이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지인의 소개로 포천에 있는 요양원이 재활원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번 들어가면 면회도 되고 잠깐 얼굴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코로나 사태가 안정되고 재활을 해서 상태가 좋아지면 집으로 모실 계획이었다. 사촌들이 달에 가서 면회는 됐지만, 근황을 듣고 식사를 잡숫는다고 하여 간식거리를 사다 넣어드리는 정도가 있는 다였다. 말씀도 하시고 하루 종일 눈만 감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달에 병원에 가실 때가 되면 잠깐 병원에서 말씀도 없는 얼굴을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사촌들의 말에 의하면 많이 마르셨다고 했다. 나도 병원에 가는 길에 속에서 잠깐 통화가 아닌 통화를 하곤 하였다. 마지막 통화를 것이 열흘 이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아침에 일어나니 사촌들에게서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카톡이 있었다. 에이 ~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병원에 나들이도 하셨는데 …… 정말인가? 불과 전만 해도 보고 싶다고 죽기 전에 왔다 가라고 그랬는데. 그래서 코로나 사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행히도 코로나가 음성으로 판정이 되어서 사촌들이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릴 있었다니 불행 다행이라고 있었다. 요양원에 들어 가신지 반정도 지나서였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산타가 선물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고 야속했다. 이런 선물 원하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싶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없었다. 시대를 살아오면서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살아오신 생애가 너무나도 불쌍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다는 말씀이 귀를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다. 가지는 못하지만 보내온 사진 속에 꽃으로 곱게 장식된 관에 누워계신 고모를 보니 이젠 편하실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장례식 날은 날씨도 그렇게 춥지 않고 화창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고모부와 함께 합장했다고 한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도 했던 고모부님 곁에 죽어서라도 함께 하셨으니 하늘나라에서 만족스럽게 웃고 계실 거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