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 사람이 만난 건 인생의 후반전인 60이 다된 나이였다. 남자는 60살 여자는 58살.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서로의 배우자들과도 이별한 나이에 둘이서 남은 인생을 함께 즐기며 노후를 살아 보자고 결혼을 한 것이다. 물론 젊었을 때처럼 불타는 사랑은 없었지만 계속해서 만나면서 둘이 함께 살면 참 편하고 좋겠다는 생각에 둘 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뒤늦게 만난 두 사람의 일상은 꿈과 같았다. 둘이 함께 모든 것을 같이 하며 당연히 모든 게 다 분홍빛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인제서야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 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
그렇게 꿈 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엔 가부터 남자가 잔기침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처음엔 감기인가보다 했다. 한 동안을 감기가 낫기만 기다렸다. 그깟 감기쯤이야. 그러나 감기는 낫지 않고 열도 가끔 났으며 거기에 덧붙여 기침할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시작된 거였다. 감기가 심해져 결국은 의사한테 갈 수밖에 없었고 받은 진단은 독감이었다. 약을 사서 한동안 복용을 했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다시 의사한테 가서 증세를 설명하고 약을 다른 것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 의사는 다시 진찰을 해 보더니 정밀검사를 받아 볼 것을 추천했다. 하라는 검사를 다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은 몇 년과 같이 길었다. 그러나 별일이 아니겠거니 하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날이 다가왔다. 두 사람을 앉혀 놓고 의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경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암이란다. 그것도 악성 암이란다. 양쪽 폐의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악성 암이란다. 수술도 할 수 없고 방사선도 안 되고 항암치료밖에는 할 것이 없단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젊었을 때 잠깐 피운 거 밖에는 담배라고는 입에 대 본 적도 없었다.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치료는 해야지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의사가 권하는 대로 항암치료에 희망을 품고 시작을 하기로 해본 것이었다.
항암치료는 몸에 지독한 부작용을 가져왔고 6개월의 항암치료에도 암은 반응 없이 더 커져만 갔다. 그 후 6개월 동안 암과의 전쟁을 또 치렀지만, 암세포는 점점 더 커져 가기만 했다. 결국 불치의 판정이 내렸을 때는 치료의 부작용에서 해방된다는 안도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 모든 걸 포기하고 1년 동안을 집에서만 지냈다. 그러다 숨이 차고 가빠져 더는 집에 있을 수가 없어 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남자가 간 곳은 내가 일하고 있는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미국의 병원은 가족이나 간병인 제도가 있는 한국의 병원 시스템하고 많이 달라 모든 걸 병원에서 다 제공해 주고 있다. 환자의 가족이 방문해도 방문 시간이 지나면 집에 가야 한다. 그러나 호스피스병동은 예외이다. 의사와 간호사 밖에 없으며 간호사가 하다못해 세수를 씻겨 주는 거부터 밥 먹는 거까지 해서 모든 걸 다해주고 그만큼 값도 비싸다. 모두 독방이고 환자가 원하면 가족이 머물 수도 있어서 방에는 소파침대도 놓여 있고 모든 걸 가족의 편의를 위해서 병원 측에서 도와주고 있다. 물론 있고 싶지 않으면 있지 않아도 된다.
보호자는 환자와 같이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보호자들과 다른 점은 움직일 수 없는 환자만큼이나 보호자도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였다. 일이 있으면 인터폰으로 부르거나 요구사항을 얘기했다. 그 환자는 진통제를 피하주사로 꼽고 있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의식이 돌아와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 자기가 없으면 얼마나 외롭겠냐는 것이었다. 그 귀한 시간을 위해서 환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환자의 목욕이나 기저기를 바꾸는 일이나 그 밖에 소소한 일까지 보호자가 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도 편해서 좋다고 했지만, 날이 지날수록 보호자의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날로 심해져 가는 환자만큼이나 수척해가는 부인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부인에게 집에 가서 좀 쉬다 오라고 종용했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사실 하루 24시간을 환자 곁에 붙어 있는다는 게 쉬운 일을 아니다.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방에 갇혀서 환자가 아닌 환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방은 넓고 모든 게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맑은 공기라도 쏘이고 바깥 구경도 좀 하고 싶지 않을까? 하물며 가족이나 친지들이 방문해도 문에서 인사를 하지 절대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의 상태가 아주 나빠졌다. 숨도 인공호흡기를 끼지 않으면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의식은 하루에 한 번쯤 돌아올까 말까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만큼 부인의 상태 또한 나빠졌다.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 같다고나 할까?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하루 종일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곁을 지키는 거였다. 우리는 부인을 설득하는 것은 가망이 없다고 느끼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생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줬다.
어느 날 다른 도시에서 남편의 친척들이 찾아왔다. 한참을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잠시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친척들을 따라 병실을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10분 정도만 환자를 혼자 둔다고 말을 했다. 10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나겠냐고 부인을 안심시키고 부인은 친지들과 함께 병원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담소를 나누고 약 10분의 시간을 보낸 후 조금은 환한 얼굴이 되어 들어 왔다. 그런 부인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좋았다. 그리고 부인이 자주 바깥 바람을 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늦었다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던 부인이 조금 있다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환자가 이상하니 좀 와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뛰어서 그 방으로 갔다. 그러나 환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그 10분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부인은 환자에게 매달려 자리에 없었던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자책을 하면서 우는 것이었다. 자기가 없어서 혼자 숨을 거뒀다는 것이었다. 그 10분을 못 기다렸냐고 세상 떠난 남편의 가슴을 치며 우는 부인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의사를 부르고 장의사까지 절차를 모두 마친 후에 남편도 없는 방에 멍하니 앉아 있는 부인을 밖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부인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그 환자는 그 전에 죽고 싶어도 부인 때문에 죽지 못한 것이었다고. 그래서 산소호흡기에 생명만 유지한 채라도 살아있었던 것이라고. 그러자 부인이 잠시 곁에 없는 틈을 타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고. 환자는 그런 순간을 기다려 온 것이라고. 부인은 처음엔 그런 사실을 부인하다가 나중에는 환자를 원망하고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우는 부인을 보면서 우리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록 같이 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사랑은 누구에게도 못지 않는 깊은 것이었다. 그래서 환자로서라도 곁에 오래 있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오래 질병을 앓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갈 때는 대개 누가 보고 싶은지 또는 자기의 침대 머리맡에 누구를 둘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 남편은 차마 자기 부인에게 그런 아픔을 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자기의 부인이 너무 안쓰러워서 없는 틈을 타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아마 오랫동안 그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부인을 위로한다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해 주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울면서 자책하던 부인도 결국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남편의 배려에 감사하게 되었다.
부인도 떠나갔다. 우리는 그 방을 치우면서 왠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그 부인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우린 모른다. 단지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1달 반의 노고가 부인의 맘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고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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