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심우장 방문♧
#자작글
■심우장 보여드릴께요
길상사를찍고 심우장으로 가는갈은 조금 골목 길 조금 경사 진곳도 있고
북촌 한옥길같은분위기
한용운은 (충남홍성에서 출생 1879년 8.29~1944년 )
말년에 서울의 성북동 심우장을지으면서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자 총독부를 향해
집을지을수없다며 북향으로 집을 짓다 이집에서 독립운동의 미밀결사대 만당을 조직하는둥
활동하다가 1944년 69세로 떠났다고합니다
저 가파른곳에 어찌 시장를이용하며
가구은 어찌 운반 할까 조금 급경사도 있고 가파랐다 그리고 이야기와 차가있는
수연산방 이동 손님이 믾아서
다시이동 차대신 생맥르로 통닭과
조촐한 뒷풀이
본인의 카스에 등록한글
#심우장 1933년 건립
만해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한옥
내용
시도기념물 제7호(성북구).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다.
총 112.99평의 대지 위에 17.8평의 건평규모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다
. 집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형태이다.
우측 서재로 쓰던 우측 방에는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용운은 만해(萬海)라는 호(號) 외에 필명으로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 목부(牧夫), 실우(失牛) 등의
이름을 가끔 썼는데 목부란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곧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왕생의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 즉,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이다. 1984년 지정되었고,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길상사에서 나오서 심우장으로 향합니다 이리갈가 저리갈가하다가
가이드님 안내하는 길로 향합니다
한낮이랴도 그다지 덥지않아서 좋았습니다
성북동의 문화재로는 선잠단지와 성락원 만해한용운 심우장 이있다고합니다
성북동 서울시성북구에 속한동 북쪽엔 북한산이있고 서울성곽이부채꼴모양
도성수비를 담당햇던 어영청을 북돈 이설치되고 이마을이
도성북쪽에있어 붙혀진 이름이라고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만해한용ㅇ운은 3.1운동후
총독부를 등지고 일본인 뵈기싫어 북향으로 지었는데 독립운동가인
오세창 이 심우장 이라고문패를 써주었다고합니다
쉬는 날 : 연중무휴
이용 시간 : 09:00~18:00
주차장은 없고 그냥 위로걸어서 올라 갔어요
집들이 엄첨 허름하죠 서울한곳에는 삐까뻔적한 고층 담이 있는 고가저택이 있는가하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을것같은 돌담집도 ~~~~~~~~~ㅎㅎㅎ
집들이 허름했어요 부지련히 이동하면서도 ~~
심우장으로 가는길에도 살구나무 오디나무가 많았어요
저기보이는곳은 무슨 교회였던것 같아요 우리의 멋진 리이드해주신 분
그래도 멋진 신사복으로 등장 아마 부산에 가족행사 (기일이 )있어서 급하게 도착
도보트래킹을 주선해주신분 ㅋㅋㅋ뒷모습만 공개 하하하
평지같은데요 여기는 큰도로입니다 사실은 경사지고 골목길을 돌아서
뱅뱅 돌아 온것 같아요 사진엔 없지만
심우장 안내가있는곳까지 도착했습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7호랴고합니다
성북동 역사 문화마을에는 심우장외에 ~~
*서울한양도성 ,(사적 제10호 )
*성락원 명승 35호
*간송미술관
*한국 가구 박물관
*서울선잠 단지 (사적 제83호
*성북동 이종석 별장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 )
*상허 이태준 가옥 (서울시 ㅣㅁ속문화재 제11호 )
소설가이태준 시인이 월북할때까지 살던집
*최순우 옛집 (등록문화재 제268호)
전편에서 자세히 읽어보셔요
*우리예돌 박물관
있다고합니다
만해한용운은 불교개혁자이며 시인 독립 운동가
사실은 아내도 버리고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러 집을 북향을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되고
시베리아와 만주를 그리고그이후 28세때 설악산 백담사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고합니다
1910년 불교반혁을 주장 (조선불교유신론 )저술하고 1926년 근대 한국사 작품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님의침묵을 펴낸뒤 민족운 동단체인 신간회가담
조국의 독립을 끝내 보지못하고 생을 마감
1919년 일본 식민지로부터 한국 독립을 선언한 33인의 대표중 한분이기도 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 하였다
만해시의 주된관심은 인간의본성과 경험의신비에 관련된 철학적 명상이다
사실 만해 한용운의 공원이라기보다 간이의자 같은 모습 이다
공원이라기 보다 그냥 큰도로에 작은 쉬어가는 공간 같은모습이었다
동상이 새겨져있고요
학창시절 한번쯤 달달 외워봤을 시 님의침묵 (1926년 발간 )
그리고 우리가 달달 외워봤을시 님의 침묵 한번 또다시 읽어보고요
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중략 ~~~~~~ㅎㅎㅎㅎ
우리는 님을 나라를 생각하지만 지금은 님을
후세에서는 아내를 상징 한다는 뜻도 있다고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이시를 참많이도 외웠죠
시험에라도 나올듯이요 말이죠
사진에 없지만 심우장 가는 길은 그냥 나무 계단이었어요
시도기념물 제7호(성북구).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성북동은 원래 성밖 한적한 동네 만해한용운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옆으로돌아가면 남녀 화장실이 있어요
그리고 관리실도 있는것 같았어요
한용운은 (충남홍성에서 출생 1879년 8.29~1944년 )
말년에 서울의 성북동 심우장을지으면서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자 총독부를 향해
집을지을수없다며 북향으로 집을 짓다 이집에서 독립운동의 미밀결사대 만당을 조직하는둥
활동하다가 1944년 69세로 떠났다고합니다
일제 에저항하는 삶을 일관 했던 만해한용운 은 결국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합니다
입구들어가서 설명서 기록해둔것이 있었는데 나무그늘에 사진찍었으나 제데로 안보여서
내려버렸어요 펙트만 정리 한글입니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야 있어요 심우장은 요
마당에서 찍은사진 입니다 심우장에서
한용운 집은 엄첨 보기에도 궁핍하게 보였어요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저절로 느겨졌어요
마당에 만해 한용운님이 직접 심은 소나무 있었는데 안찍었나 없네요
패스요 90년이넘은 소나무랴고하는데요 아 글자 가린것이 그소나무 인가 봐요
제가 삭제해버려서 없네요 ㅠㅠㅠㅠ
마당 한켠에 옆에
#바위치
마당 한켠에 옆에
#꼬들빼기
우리가 흔히아는 김치해먹는 꼬들배기에요
곡물꽃도 자세히보면 이뿌답니다
설명은 성북동 나들이에서 확인하셔요
참 오랫만에 보는 굴뚝 입니다
소화기도 보이고요
올라갈대에는 몰랐는데 열심히 앞만보고 올라가다가 내려오면서보니까 ~~
우리를 가이드해주신 분입니다 저멀리 창원에서 친구의 부탁받고서
서울로 상경 친구의 부탁받고 올라온 친구님부부의 정성에 감탄합니다
장난 아니게 경비도 많이들어갈텐데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요즘같이 우울하고 각박한 삶에서 세삼 고마움 느낍니다
어딜가나 카메라님 등장 수연산방 출입구입니다
우리는 다소 빡빡한 일정을 마치고 그제사 단체 인증샷을 남겨 봅니다
신나게 계속 걷기만 했거든요
나사진 올린것 알면 초상권 침해했다고 기절하려나 나 보기 가드 해줄사람 공개 모집합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이 평생에 처음 가져본 유일한 집이라고합니다
백담사를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여기서 말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삼우장이란 선종의 깨달음 경지에이르는 과정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가지 수행 단계중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찿는다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소가 뭐길래 전편에서 보여드렸던 (최순우 옛집)에서
등록 한 조지훈 시인님도 본인이 거처한 곳을 방우산장이랴고 하더니
만해 한용운 님도 심우장 무슨 뜻인지 아리송 ㅋㅋㅋ?
우리는 여기서 휴식을 하고서 수연 산방이라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어디인지 저도모르겠어요 이런 평지도 있었나 내기억은 까고막만 있던데요
계단만 있고요 ㅋㅋㅋㅋ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의 시 성북동
사랑과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문명과도시개발에
의한 자연파괴로 보금자리로 쫒기는 신세로 전략 해버린모습읋 형상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너무 조용했어요
무늬만 비둘기 공원 아무것도 없어요
벤취하나 비둘기 책방하나만 덩그려니 있어요
유일한 성북동 비둘기만 ㅋㅋㅋ
도시근린공원 처럼 꾸며져있지도않고요 잘꾸며 져 있지도 않아요
그냥 작은 쉼터같았어요
성북동 비둘기는 사라지고 이제는 여기에만 ~~~~~~~~~~~ㅎㅎㅎㅎ
오디 나무 살구 나무 도 더려더려 있고요 집들이 80년대집처럼 허술한 집도요
성북동 에는 부자도 많지만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나봅니다
도심속 빌딩숲 고층 아파트를 벗어나서 시골길 같은 정취가 묻어있었어요
조용히 오던길을 되돌아 다시 내려왔어요
그리고 조금 걸어서 수연산방으로 향했어요
수연산방 수다뜰고 쉬어가는 페이지라해서 기대하고 갔어요
무엇인지도 모르고요
수연산방 내부는 일일히 구경 하지 않았어요 들어갔다가 손님들이 많아서
마당 한귀퉁이 정원에서요
#다알리아
수연산방
1933년에 지어진 개량한옥이며, 소설가 이태준이 머물면서 작품을 집필하던 곳이며
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더욱더 자세한것은 아래에서 확인하셔요
상허 이태준 가옥 (서울시 ㅣ속문화재 제11호 )
소설가이태준 시인이 월북할때까지 살던집
수연산방은 전통 찻집이며 원래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
잘안보이지만
* 상허이태준의 고택이라고합니다
1933년부터 1946년까지 황진이 왕자호 문학작품을 집필 이제는 찻집
이태준조카 손녀딸인 조상명씨가 1998년 찻집으로 문을열였다고한다
이태준은 1933년에 이한옥을 지으면서 수연산방 당호를 짓고살았는데
그시대 그이름 그데로
*수연산방 이란 여려사람이 모여 산속에집에서 책일고 공부한는곳이라고 합니다
손님이 많아서 들어갈수가 없어서 마당 ( 정원) 꺼죽데기만 보고왔어요
저녁시간 휴일같은날에는 예약을 해야 갈수 있나봐요 ㅋㅋㅋ패스
*영업시간은 평일은 11;30~18;00
주말은 11;30~22;00
휴일은 월요일
수연산방에서 만난 꽃입니다
#백합나리
#삼색 제비꽃
#맨드라미
#한련
#패튜니아
#삼색 제비꽃
#접시꽃
#한련
#한련화
*원산지 인데스 페루 콜롬비아 볼리비아
*꽃말 애국
*개화시기 6월
*색깔 황색또는 적색
*식용 꽃은식용이가능하며 섭취시 암술과 수술을 제거한다
꽃은 샐러드나 비빔밥으로 먹는다
괴혈 병 감기 신경통 에좋으며 혈액순환 강장작용 살균작용 에 효과가
있다
#수국
#안스리움
#메리골드
#메리골드
#제라늄
당대최고의 문장가이면 서 한국 문단의 시인
일제시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한국 단편의 완성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랴고하는 데 저는 이시인
처음 알게되네요 비록 무식 하다고 비웃을 지
몰라도요 교육적으로 교과서 에서 배우는
지식과 현장 체험하면서 알게되고 느끼게
되는 것 또 한 도보의 여행 맛 묘미가 아닐까요
성북동을 거닐면서 참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네요
수연산방 정원이 아기자기해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랴고 적혀 있었어요
3.3.5.5 젊은 분들이 많았어요
그냥 복잡해서 빠져나왔어요
작가가 어떤분이신지 검색해본 자료입니다
월북했다것만 나와있어서요
일제 식민지 치하 비운의 작가 이태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남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상지대학교에서 수학
1927년 7월 『조선문단』에 「오몽녀」가 당선 문단에 등단
일제시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한국 단편의 완성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태준 저『문장강화』는 문장작법의 영원한 고전
정지용·김기림·박태원·이상·이효석·김유정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로 9인회 구성
1939년에는 『문장』지 창간 편집자 겸 주간으로 활약
김일성대 교수인 정률은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렀으며,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 초청으로 중국 대륙을 한 달여간 방문,
이듬해 『위대한 새 중국』이라는 중국 기행문을 발간(국립출판사)
1957년 평양 추방 후 해주 황해도일보사 인쇄공으로 배치
1964년부터 중앙당 101호 창작실 ‘비밀작가’
1974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
고철 장수 등 전전
아내가 죽은 직후 행방불명.
[작가 소개]
**이태준(1904- ) 강원 철원 출생. 1920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여 활동을 시작함. 박태원, 이효석, 정지용 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해방 후 월북하였다가 숙청되어 고철 장수 등을 전전하다 숨졌다고 한다. 문예지 <문장>을 주관하였으며, <문장 강화>는 문장론의 모범으로 꼽힌다. 그는 아름다운 문장의 대가였으며, 그의 소설에서도 그 점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세계에 어울리는 문체, 세태의 변화에 밀려 가는 소외된 자의 잔잔한 아픔이 서정적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상고주의적 측면을 짙게 풍기는데, 그것은 격조와 통하는 정신주의의 일면이라 하겠다. 소설뿐 아니라 동화, 희곡도 다수 발표하였으며, 많은 평론문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아무 일도 없소", "불우 선생", "돌다리", "산월이", "영월 영감", "까마귀", "농군", "해방 전후", "꽃나무는 심어 놓고", "마부와 교수", "딸 삼형제" 등 주옥 같은 단편들이 많이 있다.
#나리
*원산지 동아시아 전국각처에 재배
*꽃말 순결 무죄 평범 순수
*꽃은 크고 꽃잎 3장과 꽃받침 3장 으로이루어진다
수술은 6개이고 꽃받침은 T자형
원예종으로 다양한품종이있다
크게 나팔나리 오리엔탈 나리 아시아틱 나리 3가지로 나눈다
내려오니 미술관도 보였어요
수연산방에서 내려와서 차대신 간단한 생맥과 통닭 마무리
샘맥보다 때로는 허풍선 과자가 맛나 ~~~~~~~~~~ㅋㅋㅋ
정신이 들정도로 시원했어요 저의 치사량은
기분좋게 맥주 1컵정도
건강을 위해서 권하는 것 사양 ~~ㅋㅋㅋㅋㅋ
맛글쎄요 모두들 폭풍흡입 하지만 전 조금 통닭요리를 안좋아해서 깨작깨작
들었다 났다 ㅋㅋㅋ느끼해서요
안먹는 음식은 아에 입에도 안되거든요 ㅋㅋㅋㅋ
그래서 모두 헤어지려다가 또다시 카페로 ~~~~~이동 했어요
인견 으로 된 옷도 판매하고 있었어요 매장도 넓었어요
각기호데로 시키고 전
각기호데로 시키고 전
제가마신 커피입니다
#알 며느리밥풀
*원산지 한국
*꽃말 여인의 한
*개화시기 8~9월
*색깔 홍자색또는 청색
*키 30cm~70cm
잎은 주앙에 있는잎이난형이며 뽀족하다
잎의가장자리는 밋밋하나 꽃이있는쪽은
가시같이 뽀족하다
#백당나무
*원산지 한국 일본 중국
*꽃말 마음
(꽃과 열매가아름다워 조경용수로 이용 공원의 교목하부에식재하거나
사찰주변에도 어울린다
계곡과 산허리에 습기가 있는 지역 군락을 이루어자란다
자 구경은 잘 하셨나요 성북동 나들이였습니다 |
일행 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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