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달빛
그가 아이였을 때 새벽달은 종종 보았다.
마루 끝에 서서 길게 달빛 같은 오줌을 누던 것을.
간혹 어머니한테 들켜서 꾸중을 들었으나 그는 이런 핑계를 대곤 했다.
"달빛하고 누가 더 하얀지 보려고요."
소년이 되자 그는 집이 가난하여 우유 배달을 하였는데
그때 새벽달하고 가장 정이 들었었다.
어떤 날은 윗사람으로부터 야단을 맞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도 했었다.
그러면 달빛은 하얀 손수건처럼 그의 뺨 위에 내려서 그를 위로하곤 했다.
청년 시절에도 그는 새벽달과 친하게 지냈다.
도서관을 새벽 달빛 속에서 찾아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새벽달한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다짐을 했다.
"두고 봐라, 난 반드시 이루고 말 테다."
그런데 그가 머리를 빗어 넘기고 넥타이를 매면서부터였다.
그가 점점 새벽달한테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의 옥상 위로 새벽달이 지고 있었는데
어느 방의 창가에 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속옷 바람의 여자가 있었다.
"아하, 결혼을 한 게로군."
새벽달은 빙그레 웃었다.
그날 이후로 십 수 년은 그를 통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달이 도시의 골목을 비추고 있는데
그가 술에 젖어서 전신주에 기대서 있었다.
그동안에 그가 변한 것은 약간의 대머리와 약간의 배불뚝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혀가 굳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혀엉편 없는 노옴이야······
어머니, 어머니 하안 분도 제대로, 제대로 모시지 모하고 있어······."
십 수 년이 또 지났다.
어느 날 무심히 새벽달은
어떤 병원의 창을 넘어다보다 말고 깜짝 놀랐다.
파리해진 그가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새벽 달빛이 고여 들자 그것이 홑이불인 줄 알고
헛손질을 하던 그가 문득 눈을 떴다.
그가 반기는 것을 새벽달은 참 오랜만에 보았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도 헛살아온 것 같아. 내 삶을 내 식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눈치에 맞춰 남의 식으로만 살아온 거야.
작은 것도 서로 나누어 가지면서 사람답게 살고자 한 것이
나의 청년 시절의 꿈이었는데······."
오랜만에 열린 그의 가슴속으로 새벽 달빛이 조용히 흘러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보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되
편안함과 타협하지 말고 명예를 지나치게 탐하지 말게나.
그리고 간혹 숨을 멈추고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새소리 한 낱. 바람 소리 한 낱이 때로는 소중한 기쁨을 주기도 할 걸세."
다음 날 새벽달이 그를 찾아가 보니 그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새벽 달빛만이 침대 위에 쓸쓸하게 있다가 돌아갔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만나게 될는지······.
아니면, 어느 공동묘지에서 그의 묘비를 발견하게 될는지······.
출처 : 참 맑고 좋은 생각(정채봉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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