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뭐 하십니꺼
삼수라는 대입의 마지노선마저 뚫린 내겐 입영 영장만
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냥 귀엽다고 거친 수염으로 내 얼
굴을 비비시던 아버지의 얼굴은 어릴 때의 추억일 뿐이었
고 부자 간의 말 없는 냉전은 6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대했던 아들에 대한 실망,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못
마땅함. 어느덧 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은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대를 한 뒤 나는 마음 둘 곳 없는 백수가 된다는 것
이 두려웠는지 인생의 진로를 수정하고, 대학 가서 그리리
라 마음먹고 접어 둔 꿈인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데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 것일까? 기대하지 않았던 첫 번
째 도전인 신인 만화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때마침 집에 오신 아버지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렸지만 "그거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냐?" 라는 무뚝뚝한
대답만 들었다. 섭섭했다.
며칠 뒤 나는 예전에 살던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공모전 입상을 자랑했다. 그런데 뜻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 ~ 이거구나! 느 아부지 어제
술이 이빠이 되어 갖고 사람들한테 술 사면서 아들 자랑
하더만."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를 향해 내가
쌓은 이유 없는 못마땅함이란 벽이 한 번에 허물어지는 순
간이었다.
이제는 서먹함이 남아 있었다. 난 처음으로 특별한 용
건도 없이 아버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부지, 뭐 하십니꺼?"
얼떨결에 튀어나온 나의 첫 마디는 친구에게 전화할
때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이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요
즘도 종종 부자 간에 용건 없는 전화 데이트를 한다. 이젠
수다를 떠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출처 :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 글 정훈이(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