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아부지, 뭐 하십니꺼

doggya 2010. 7. 23. 08:11

 

 

아부지, 뭐 하십니꺼

 

 

 

삼수라는 대입의 마지노선마저 뚫린 내겐 입영 영장만

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냥 귀엽다고 거친 수염으로 내 얼

굴을 비비시던 아버지의 얼굴은 어릴 때의 추억일 뿐이었

고 부자 간의 말 없는 냉전은 6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대했던 아들에 대한 실망,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못

마땅함. 어느덧 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은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대를 한 뒤 나는 마음 둘 곳 없는 백수가 된다는 것

이 두려웠는지 인생의 진로를 수정하고, 대학 가서 그리리

라 마음먹고 접어 둔 꿈인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데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 것일까? 기대하지 않았던 첫 번

째 도전인 신인 만화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때마침 집에 오신 아버지께 기쁜 소식을 알려

드렸지만 "그거 하면 밥 먹고 살 수 있냐?" 라는 무뚝뚝한

대답만 들었다. 섭섭했다.

     며칠 뒤 나는 예전에 살던 동네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공모전 입상을 자랑했다. 그런데 뜻

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 ~ 이거구나! 느 아부지 어제

술이 이빠이 되어 갖고 사람들한테 술 사면서 아들 자랑

하더만." 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를 향해 내가

쌓은 이유 없는 못마땅함이란 벽이 한 번에 허물어지는 순

간이었다.

 이제는 서먹함이 남아 있었다. 난 처음으로 특별한 용

건도 없이 아버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부지, 뭐 하십니꺼?"

   얼떨결에 튀어나온 나의 첫 마디는 친구에게 전화할

때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이었다.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요

즘도 종종 부자 간에 용건 없는 전화 데이트를 한다. 이젠

수다를 떠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출처 :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 글 정훈이(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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