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향기 같은 우정
아기가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성장하듯이 사람은 누구나 흔
들리며 살아간다.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모든 것들에 대
한 그리움 그리고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언행과
생각들 때문에 흔들리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려운 시절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돼준 것은 지난날의 뼈아픈 기억들이었다. 특히 내 아픔
의 한복판으로 다가와 손을 내민 사랑이 있었기에 쓰러지지 않
고 지금껏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맑은 가을날 내가 가르치던 한 아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자기와 둘도
없이 친한 친구 문제로 상담을 했다.
그 친구는 요즘 들어 결석도 잦고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어
봐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밤
늦게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장사로 바빠
밤 열두 시나 돼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딸의 탈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편지도 써가며 설득했지만
그 친구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 이렇게 흔들리는 친구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솔직히 그 친구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들의 우정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한참
을 생각하고 나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친구의 우정 어린 설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너는
무어라고 생각하니? 그 친구도 아마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거야. 흔들리는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네 목소리를
친구는 잘 들을 수가 없는 거야. 친구가 흔들리면 그가 있는 곳
까지 따라가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끝없는
애정으로 잡아주면 돼. 그래야 비로소 그 친구는 네 우정의 진
정성을 알게 될거야. 자기는 밝은 빛 속에만 있으면서 어둠 속
의 친구를 나오라고 하면 친구는 영영 어둠 속에 갇혀버릴지도
몰라. 용기를 내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데리고 빛으
로 나와야지. 그리고 올바로 서기 위한 흔들림은 흔들림이 아
니야. 오히려 그건 바로서는 일이야. 너로 인해서 한 친구가 일
어설 수 있다는 확신 앞에서 약해지면 안 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간 그 아이는 몇 달 간의 끈질
긴 노력으로 결국 친구의 천진했던 제 모습을 찾아주었다.
얼마 전에 좌석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택시도 태워
주지 않을 정도로 술에 취한 친구를 등에 업고 버스에 오르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인사불성의 친구를 힘겹게 자리에 앉히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는 자신의 옷소매로 친구 얼굴에 흉하게
묻어있는 토사물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스며 흔들리는 그들을 모두가 쳐
다봤다. 버스 안에 있던 어떤 사람도 그들을 욕하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아름다운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한밤내
초롱초롱 별이 되고 싶다면
나는 밤새도록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대의 등 뒤에서
어둠이 되어주겠습니다.
그렇다. 사랑과 우정은 정녕 이와 같아야 한다. 자기가 진정
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한
다. 그리고 그가 더욱 밝게 빛나도록 그의 배경에서 짙은 어둠
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그렇게 하기에 너무나 비좁고 나약
하다. 자기는 대학에 떨어져 상처받고 있을 때, 친한 친구의 합
격 소식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플 때가 있다.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합격 소식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
어야 하고, 그 기쁨으로 자신의 아픔을 일으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나에게 소
중하게 기억되는 것이 있다.
"진정한 우정은, 상대방이 슬퍼할 때 진심으로 그 슬픔을 같
이 해주는 거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큰 우정은, 친구의
기쁨을 온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주는 일이다."
슬픔을 함께 하는 것도 어렵지만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하
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다.
우정과 사랑은 감귤과 같은 것이다. 감귤은 그다지 향기롭
지 않다. 그런데 껍질을 벗겨내면 속살을 터트리며 이슬처럼
상큼한 향기가 터져나온다. 교실이나 버스에서 어느 한 사람이
귤을 먹어도 그 주변 사람들은 그 향기를 금세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안에 간직한 고운 향기, 바
로 그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다.
그러나 감귤 같은 우정과 사랑의 향기는 아무나 느낄 수 없
다. 거름을 주어 귤나무를 실하게 하고, 귤꽃이 피었을 때 바람
을 막아 주고, 늘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봐야 한다. 또 메마른
날이면 시원한 물도 주면서 정성껏 사랑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다가 나무에 파랗게 열매가 매달리면 가끔 어루만져 주면
서, 주황빛으로 그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은 사랑으로 애쓰며 기다린 자에게, 감
귤은 안으로 간직된 향기로 살며시 다가온다.
친구가 많다는 것이 진정으로 친한 친구가 많다는 것을 의
미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한 사람의 정이 여러 사람에
게 나뉘질수록 그 정은 소홀해지기 쉽고, 상대방도 작은 사랑
으로 받아들이기가 쉽다.
말 그대로 둘도 없는 친구, 둘도 없는 사랑이란 밤하늘의 초
롱초롱한 별이 되고 싶다면 눈도 막고 귀도 막고 그의 배경에
짙은 어둠이 돼줄 수 있는 고귀한 마음이다.
출처 : 반딧불이(이철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