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달챙이 숟가락

doggya 2010. 9. 7. 09:47

 

 

달챙이 숟가락

 

 

 

               나 어릴 적, 밥상 위에 올려지는 식기는 사기

와 놋쇠로 된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놋쇠로 만들어진 그릇

은 보온성이 좋아서 주로 어른들께서 사용을 하셨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은 놋쇠로 된 것이었는

데, 놋쇠로 된 숟가락은 얇아서 사용하기 편리했지만 아주 빨리 닳아

버렸습니다. 어른들께서는 그 놋쇠숟가락 중에 유독 많이 달아서 반

쪽만 남은 수저를 달챙이 숟가락이라 불렀습니다.

 보통의 숟가락이 보름달이라면, 이 달챙이 숟가락은 반달이었습니

다. 항상 반달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작아져 초승달이 되었다

가 그 운명을 다하는 달챙이 숟가락이었습니다.

 쓰면 쓸수록 숟가락의 날이 날카로워지던 이 달챙이 숟가락은 집

집마다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최소한 한 개의 달챙이 숟가락이 있었

으니, 그만큼 이것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밥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는 이것이 있어야 쉽게 긁을 수 있었

습니다.다른 숟가락의 끝이 두툼한 반면 이 달챙이 숟가락으로 누룽

지를 닥닥 긁어 밥그릇 위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감자를 깎을 때는 달챙이 숟가락의 둥글게 흠이 파인 부분에 감자

를 대고 숟가락 끝으로 살살 긁으면 껍질이 잘 벗겨졌습니다. 또한 감

자의 오목 들어간 씨눈이나 상한 부분을 오려내기도 좋았습니다.

 작고 울퉁불퉁하여 껍질을 깎아내기 어렵던 생강도 이 달챙이 숟

가락을 쓰면 그 좁은 골을 따라 구석구석 껍질을 긁어낼 수 있었습니

다.빨간 색깔의 고구마도 바닥에 뉘이고 이것으로 득득 긁으면 붉은

빛 고구마 껍질이 얇게 벗겨졌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이 달챙이 숟가락으로 과일을 긁어 잡수셨

습니다. 수박, 참외, 복숭아, 사과 등 무슨 과일을 잡수시던지 이것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강판이 있을 때도, 믹서란 편리한 기계가 나왔

어도, 할머니께서는 항상 달챙이 숟가락을 찾으셨습니다.

 이빨이 다 빠져 합죽이가 되었던 할머니께서는 달챙이 숟가락으로

과일을 사가사각 긁은 다음에, 과즙이 흥건하게 담긴 숟가락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셨습니다. 연신 맛있게 잡수시는 모습을

보면 침이 저절로 넘어갔습니다.

 밖으 날씨가 몹시 춥던 어느 겨울날, 할머니께서 커다란 무를 하나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따스한 아랫목으로 앉으시더니 달챙이

숟가락으로 그 무를 사락사락 긁으셨습니다.

 파란하늘의 뭉게구름이 녹아내리듯 달챙이 숟가락 속으로 무즙이

모아졌고, 할머니는 그것을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옆에 앚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내 마음을 아셨는지, 할머니께서는 무즙이 담긴 달

챙이 숟가락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넙죽 그것을 받아 입에 넣자, 가슴까지 시원한 기운이 퍼지면서 달

착지근한 무즙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였습니다. 무가 이리 맛있었

다니, 평상시에 입으로 잘라먹던 그런 무의 맛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할머니께서 왜 달챙이 숟가락을 찾으셨는지를 알 수있었습

니다.

 물론 이빨이 없어서 그렇게 잡수셨겠지만, 강판이나 믹서로 갈은

과즙보다도 뭔지 모르게 특별한 맛이 있었던 것입니다. 입맛을 다신

나는 할머니의 달챙이 숟가락을 뺏다시피 받아들고 무를 '북북' 긁었

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무를 긁어먹는 손자를 보고 웃으셨습니다. '이

가 성한 아이들은 그냥 먹는 것이 맛나지 않느냐' 고 말씀을 하시며

말입니다.

 

 나는 달챙이 숟가락으로 긁어먹던 시원하고 달콤한 무즙의 맛을

지금까지 잊지를 못합니다. 지금은 그 달챙이 숟가락도 없어졌고, 할

머니도 계시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달챙이 숟가락으로 사락사락 긁

어주시던 무즙이먹고 싶은데 말입니다.

 

 

출처 : 추억 속의 달챙이 숟가락( 글 홍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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