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
뿌연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경섭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라면이며 사탕, 과자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진열대
위에 놓여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경섭 씨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경섭 씨는 계산대 위에 팔을 괴고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무
릎을 칠 만한 묘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경섭 씨는 아파
트 상가 앞에서 수퍼마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아야할 지경이었다. 바로 옆 가게는 손님들이 계
산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장사가 잘 됐다. 경섭 씨는
틈만 나면 이웃집 가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집 주인이 하
는 대로만 하면 같은 장소에 있는 자신의 가게가 안 될 리 없었
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경섭 씨 아내가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저 집 주인을 보면 손님을 꼭 왕 대하듯 한다구요. 손님 앞
에서는 그저 뱀 만난 개구락지마냥 나 죽여 달라고 설설 기는
데, 우리도 한번 그렇게 해봅시다. 밑천 드는 거 아니잖아요.'
"그 놈의 주인은 자존심도 없나. 내시처럼 그렇게 굽신거리
기만 하면 자기네들이 왕이나 된 것처럼 행세할 텐데······."
경섭 씨는 아내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지
만 문닫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벽하게 속마음과는 달
리 겉으로는 손님들을 정말 친절하게 대했다. 그 후로 예전보
다 장사가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가겟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뭔가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경
섭 씨가 이것저것 고심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그
의 아내는 경섭 씨 앞으로 뜬금없이 카세트테이프를 내밀었다.
"저 집 보면 계산대 옆에서 항상 찬송가가 흘러나와요. 그러
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다 저집으로 다 뺏길 거 아니에요. 우
리도 못할 거 없지요, 뭐. 예수 믿어야 찬송가 틀라는 법 있나
요. 자꾸 비린내를 풍겨야 고양이가 오지요."
경섭 씨는 그럴 듯한 아내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가게에서도 찬송가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
던 것만큼 장사가 잘 되진 않았다. 어느 날, 경섭 씨는 잠자리
에 들기 전 좋은 방법 하나를 생각해냈다.
평소보다 두 시간 먼저 가게문을 열고, 더 늦게 문을 닫는
것이었다. 작은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한 경섭 씨
마음은 조금쯤 들떠있었다. 경섭 씨는 다음 날 새벽에 나가기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그런데 꿈속에서 커다란 돼지 한 마리
가 나타났다. 복스럽게 생긴 돼지는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느
릿느릿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경섭 씨는 깜짝 놀
라 잠에서 깼다. 너무도 생생한 돼지꿈이 분명 좋은 일을 가져
다줄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곤한 잠을 청했다.
이른 새벽, 거리는 어둠이 짙었다. 가을을 몰아낸 겨울바람
은 차갑게 함성을 지르며 가게가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옆집 가게에는 이미 불이 환
하게 켜져 있고, 주인은 하얗게 입김을 내뿜으며 가게 앞을 청
소하고 있었다.
경섭 씨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주뼛주뼛 걸음을 늦추
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옆집 주인이 하는 행동을 보는 순간,
그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집 주인은 모아놓은 쓰레기
를 삽으로 퍼서 경섭 씨 가게 앞으로 마구 뿌리고 있었다. 그렇
지 않아도 간신히 쌓인 감정을 참고 있었는데 잘 됐다는 심정
이었다. 멱살이라도 흔들어 놓을 양으로 경섭 씨는 다가갔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요?"
경섭 씨는 옆집 주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세요? 추우신데 일찍 나오셨군요."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있는 경섭 씨에게 천연덕스럽
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경섭 씨는 그의 그런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경
섭 씨는 자신의 가게 앞에 뿌려진 것들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
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옆집 주인은 쓰레기를 뿌려 놓은 게 아니었다. 지나가던 취
객이 밤 사이에 경섭 씨 가게 앞에 토해놓은 것을 보고, 옆집
주인은 공터에서 모래까지 퍼다가 청소했던 것이다. 경섭 씨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가게에 앉아 경섭 씨는 많은 생각을 했다. 옆집 주인
의 말과 행동은 흉내낼 수 있었지만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량한 마음은 흉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익만을
생각하며 그가 지은 미소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이기심만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경섭 씨는 문득
지난밤 꾸었던 돼지꿈이 생각났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허공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돼지꿈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구먼."
그의 얼굴에는 다른 때와 달리 온화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웃으며 손을 내밀어도 거짓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출처 : 반딧불이 (이철환 지음)
You Raise Me Up-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