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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날의 행복

doggya 2010. 10. 7. 09:35

 

 

가난한 날의 행복

 

 

 

 정태는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동네에 들어섰다. 하루종일 공사

판에서 흙과 먼지를 뒤집어써 땜내와 함께 절은 점퍼 주머니에 손

을 꽂고 비틀거리며 걷던 정태는 아내가 과일 가게 앞에 서 있는 것

을 보았다. 아내는 빨갛게 살오른 딸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둠

속에서 남편을 발견하고는 달려와 팔짱을 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가누지도 못하면서···."

 "내가 술 마신 게 불만이야? 그럼 술 안 마시고 돈 많이 벌어다

주는 놈하고 살면 될 거 아니야!"

 "조용히 좀 해. 동네 사람 다 들어."

 "들으라지, 들으라고 해! 너도 정신차려. 나 같은 놈하고 평생 살

아봐야···."

 "자, 얼른 들어가기나 해."

 "어, 대답을 안 하는 건 그렇다는 거지? 그래 다 필요 없어."

 정태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계속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두 사

람이 서울 변두리 월세방으로 옮겨온 건 두 달 전이었다. 내의 공장

에서 함께 일을 하다 만난 두 사람은 피차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객

지에 나와 어렵고 외로운 처지라는 공통점 때문에 가까워졌고, 일

년 전에 결혼을 했다. 많이 배우지 못했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지만

알뜰한 미영과 성실한 정태는 참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일하던 내의 공장이 더운 날씨 탓에 수요가 사라

지면서 급기야 문을 닫게 되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일단 방 줄여서 나가보자. 살 길이

있겠지."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말자. 우린 아직 젊은데 뭐."

 "우리 애는 고생시키면 안 되는데···."

 아직 이 개월 밖에 안 된 미영의 배를 쓰다듬는 정태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이사를 하고도 한 달은 일이 없어 방에만 있었다. 벽을 보고 돌

아누워 하루종일 뒹구는 정태를 보는 미영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

가지였다. 그러다 얼마 전, 공사 일이 생겨 한 달째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미영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여기저기 일을 알아보다 봉

제 인형 마무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하루종일 눈이 시리도록 붙

들고 있어도 만 원도 채 안 되는 수입이었지만 미영은 감사했다.

 그런데 정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사실 정태는 어제 어둑한 새벽

녘에 공사장에 갔다가, 막막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이, 이제 일은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하루하루 언제 그만둘지 몰라 조마조마했는데 그 일마저 이제

끝이 보이니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집으로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남편을 눕혀놓고 돌아앉아 토끼 인형에 눈을 붙이는 미영에게

정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이 일도 끝이야. 날 뭘 믿고 사니? 나 같은 놈을 뭘 믿

고···."

 "그러지 마, 여보. 우리 애기가 들어. 당신은 진짜 행복이 뭔지

알아요? 어느 소설 중에 가난한 부부가 서로 선물을 하고 싶은데 돈

이 없어서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핀을 사고, 아내는 머리

를 잘라 남편의 시곗줄을 샀다는 얘기··· 난 그 얘기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 가난한 건 좀 불편한 거지 불행한 게 아니야. 왜 그걸 몰

라."
 미영은 철없이 방황하는 정태가 야속하고 가엾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슬며시 고개를 돌린 정태는 아내의 뒷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울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덧 창

문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정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정태는 벽돌을

나르면서도 며칠 전 아내가 훌쩍이며 했던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해가 떨어지자 공사장의 일꾼들도 마무리 준비를 했다. 수건으로 땀

을 닦고 먼지를 턴 정태는 서둘러 시장으로 갔다.

 정태는 유아용품 가게에 들러 아기 목욕통과 아기 신발을 샀다.

그리고 좌판 할머니에게로 가 딸기 한 근을 샀다.

 "어머, 예뻐라··· 어디서 이렇게 예쁜 신발을 사왔어? 아기 목욕

통까지···."

 "정말 예뻐?"

 "응···."

 어색한 얼굴로 빙긋이 웃고 있는 정태의 손을 잡으며 미영은 행

복했다.

 "이건 당신 주려고 사왔어. 당신 이거 먹고 싶었지?"

 "어머, 딸기잖아?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

 불록해진 배와 딸기를 번갈아 보는 두 사람은 배시시 웃음이 나

왔다. 까만 봉투 안에 들어있는 딸기 한 근으로 아내를 향한 사랑과

고마움을 다 전할 순 없지만 그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행복해

하는 미영과 정태의 등뒤로 저녁 노을이 딸기보다 붉게 물들어 가

고 있었다.

 

 

 하지만 미영은 몰랐다.

 아기 목욕통과, 신발, 그리고 딸기 한 근을 사기 위해서 정태가

몇 번이나 점심을 걸려야 했는지를···.그리고 집에서 공사장까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마다 힘겹게 걸으며 차비까지 아껴야 했던

것을···.

 

 

출처 : 연탄길2(이철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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