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병수 씨는 미숙 씨에게 물었다.
"당신 지난밤에 꿈 꿨어? 자다가 소리를 지르더라구."
"내가 그랬어요?"
"그럼, 자다가 나까지 깼는걸."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봤어요."
"아버지를?"
"네, 지금도 너무 선명하게 생각나요. 내가 어느 허물어진 집으
로 들어가려는데 멀리서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르더라구요. 그래
서 뒤돌아봤더니 아버님이 큰 나무 아래 다리가 깔린 채 누워 계시
잖아요.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그 나무를 들어올리는데 흙더미가
갑자기 내 위로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그 바람에 소리를 지르며 깬
거 같아요."
"그랬었구만······."
"아버님 얼굴이 많이 야위셨더라구요."
"아버지 산소에도 한번 다녀와야 하는데, 지난번 설 때도 회사
일 때문에 못 갔었잖아."
"저도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려요. 처음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많
이 허전하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이렇게 잊혀지네요."
"세상에 당신같이 착한 며느리도 없을 거야. 십 년 가까이 시아
버지 병수발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소변 다 받아내며 큰 불
평 한 번 없었으니 말야."
"지금 와서 말이지만 처음엔 나도 힘들었지요. 그런데 그런 아
버님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돼요. 더
잘 해드릴 수 있었는데······."
"아냐, 당신 같은 며느리 세상에 없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데."
"여보, 오늘 당신 일찍 퇴근하니까 아버님 산소에 갈까요? 오늘
늦게 출발해서 형님 댁에서 자고 내일 오면 되잖아요."
그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토요일 밤늦게 시골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산소에 다녀 와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 오후 서울로 오는 길은 많은 차들로 붐볐다. 짜증이 날
만도 하련만 못 다한 일을 마무리하고 오는 것 같아 미숙 씨 부부의
마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집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끔찍한 일이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불안하던 윗집 축대가 그들의 집 위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콘크리트 더미가 마치 괴물처럼 집의 절반을 흉측하게 삼키고 있었
다. 미숙 씨는 그 순간 꿈에 본 시아버지를 생각했다. 꿈속에서 그녀
가 허물어진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등뒤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시아버님의 모습······.만약 그들
부부가 산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꿈속에 아버님이 나타나지 않
았다면 미숙 씨 가족은 꼼짝없이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미숙 씨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미숙 씨는 몇 년 전 시아버님이 임종하시기 전날 밤의 일을 기
억한다. 시아버님은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편지 한 장을 그녀
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가 너무 몹쓸 짓만 시키고 가서 미안하구나. 저 세상 가서도
절대로 잊지 않으마."
미숙 씨는 지금도 시아버님이 자신의 가족을 지켜준 거라고 굳
게 믿고 있다. 꿈속에서 그녀가 허물어진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등
뒤에서 부르던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하던지······.그녀는 시아
버님 생전에 그렇게 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시아버님은 평생을 말씀 한
번 못 하시는 장애인으로 살다 가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녀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한 그 약속을 지키려고 꿈속에서나마 큰 소리로 미숙
씨를 불렀던 거였다.
사람은 떠나가도 사랑의 기억은 그 자리에 남아 끝끝내
그 사랑을 지켜준다.
출처 : 연탄길(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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