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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손을 잡는다는 것

doggya 2010. 10. 15. 09:05

 

 

타인의 손을 잡는다는 것

 

 

 

 지선이의 엄마가 집을 나간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엄

마가 집을 나간 후 한참을 방황하던 아빠는 얼마 전 마음을 추

스르고 지방에 있는 아파트 공사장으로 일을 떠났다.

 아빠가 집을 비운 지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같은 초등학교

에 다니는 동생 재영이가 지선이의 교실로 찾아왔다.

 "누나, 나 집에 가고 싶어. 막 어지럽고 토할 거 같아. 선생

님이 조퇴해도 된다고 하셨어."

 재영이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누나 지선이에게 말했다.

 "재영아, 많이 아프니?"

 지선이는 걱정스런 얼굴로 재영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어머, 이마가 불덩이네. 어떡하지···? 혼자 집에 갈 수 있겠

어?"

 지선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물었다.

 "응, 누나."
 지선이는 재영이를 교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부엌에 보면 아침에 먹던 밥이 좀 남아 있을 거야. 그거라

도 꼭 챙겨 먹어야 돼, 알았지?"

 재영이는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없이 교문을 나

섰다. 지선이는 그 자리에 서서 재영이의 뒷모습이 학교 앞 큰

길을 지나 병아리 눈망울만큼이나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지선이의 눈에는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맺혔다. 연락조차 되지

않는 엄마가 새삼스레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선이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여니 재영이가 이불도 펴지 않은 채 방바닥에 누워 식은땀을 흘

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온기도 없는

방에서 지내는 어린 재영이가 아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

다. 열이 심하게 오르는지 재영이의 신음은 점점 더 커졌다. 지

선이는 대야에 찬물을 받아 수건을 적셔 재영이의 이마 위에 올

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지선이는 산동네를 뛰어 내려갔다.

 한겨울 찬바람으로는 마르지 않는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지선이는 근처 대학 캠퍼스로 달려갔다. 예전에 그곳에서 빈

병을 주워 재영이와 과자를 사 먹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하

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예전만큼 빈 병들이 눈에 띠지 않았다.

애를 태우며 이곳저곳 다니던 지선이는 작은 비닐봉지를 겨우

채울 만큼의 빈 병을 모를 수 있었다. 지선이는 학교 정문 앞에

있는 슈퍼에 들러 주워 온 빈 병들을 돈으로 바꿨다 그리고 곧

바로 근처 약국으로 달려갔다. 턱없이 부족한 돈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곧 용기를 내어 약국으로 들어갔다.

 "저··· 정말 죄송한데요. 제 동생이 지금 많이 아프거든요.

온몸에서 열이 나고 식은땀도 많이 흘려요. 이대로 두면 죽을

지도 몰라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지선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새파랗게 얼어

버린 지선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약사에게 내민 지

선이의 손바닥에는 백 원짜리 동전 몇 개가 달랑 놓여 있었다.

 "그래. 잠깐만 기다리거라."

 잠시 후 조제실에서 나온 약사는 하얀 약봉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열도 내릴 거고, 모레까지는 먹을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며칠 있다 우리 아빠 오시면

나머지 약값은 꼭 갖다 드릴게요."

 지선이는 몇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지선이가 집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

가가 지선이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선아! 잠깐만."

 같은 반 친구 호영이였다.

 호영이는 가쁜 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사실은··· 아까 네가 들렸던 약국이 바로 우리 집이야. 들으

려고 했던 건 아닌데 방에 있다가 우연이 네 얘길 듣게 됐어.

동생이 많이 아픈가 보구나."

 갑작스레 호영이가 나타나 잠시 어리둥절해진 지선이는 얼

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호영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지선

이 앞으로 내밀었다. 작은 돼지저금통이었다.

 "너희 아빠 오실 때까지라도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가지고

와봤어."

 호영이는 동전이 짤랑거리는 돼지저금통을 두 손에 든 채로

조금은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지선아, 그리고 지난번에 어항 깨뜨린 거···.사실은 내가

허둥대는 바람에 깨뜨린 건데, 괜히 네 핑게를 대서 정말 미안

해. 사과할게."

 며칠 전 청소 시간에, 지선이는 호영이와 함께 탁자를 옮기

려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어항을 떨어뜨려 깬 일이 있었다. 선생

님에게 혼날 것이 무서웠던 호영이는,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결국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지선이가 선생님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지선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영이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지선이는 호영이가 내민 돼지저금통을 선뜻 받을 수 없었다. 하

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호영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멀리 떨어진 고층 아파트 건물 사이로 아기 입술 같은 초승

달이 둘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내 손을 뻗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

습니다.

 

 

출처 : 연탄길4(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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