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정아의 아빠는 그녀가 여덟 살 때, 아내와 딸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정아는 그런 아빠를 수도 없이 원망하며 힘든 사
춘기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도 그녀가 중학교 3학년 때 재혼
했다. 하지만 아빠에 대한 상처 때문에 정아는 8년이 넘도록 새아빠
에게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다. 새아빠는 가끔 술에 취해 들어
와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런 새아빠가 너무
싫었다.
정아는 대학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며 병원 근처에 방을 얻어 혼
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새아빠는 그녀가 근무하는 병원의 경비로
일했다. 병원 원무과의 아는 선배로부터 경비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
고, 그녀는 내키지도 않는 새아빠를 소개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엄마를 위해서였다. 엄마가 생활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다면 정아는
새아빠와 매일 마주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출근할 때도 경비실에 있는 새아빠의 시선을 애써 외면
했다. 그러다 가끔 병원 로비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게 한 번 웃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병원 구내식
당에서 마주칠까 봐,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날 무렵에야 식당으로
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그녀가 구내 식당으로 갔을 때, 새아빠가
그곳에 와 있었다. 그런데 새아빠는 식당 조리실 안에서 젊은 아주
머니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새아빠는 대화 도중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정아는 어릴
적 친아빠에게서 받은 아픈 상처가 되살아났다.
그 후로도 정아는 식당 조리실을 기웃거리는 새 아빠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식당의 젊은 아주머니와 다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정아는 그런 새아빠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
다.
"엄마, 새아빠 그 사람, 지금도 엄마한테 잘해?"
그녀는 빈정거리며 물었다.
"넌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누가 뭐래도 이제껏 널 가르친 분이
야."
"요즘 못 봐주겠더라구, 정말······."
"왜? 무슨 일 있었나?"
"엄마도 남편 복 정말 없는 거 같아. 처자식 다 내팽개치고 가는
사람이 없나······."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래도 너한테는 아버지야."
"엄마는 그런 사람이 용서가 돼?"
"처음엔 엄마도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났잖아.
너도 이제는 마음 풀어."
"싫어. 난 절대로 용서 못 해."
"마음속에 미움 두고 살면 못 써.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남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는 거야.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해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게 자기를 용서하는거야."
"엄마나 많이 용서해. 착해서 늘 상처받는 엄마가 난 정말 싫으
니까. 그리고 엄마도 정신 차려. 두 번씩 그런 일 당하지 말고."
정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차마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하루는 간호사실로 그녀를 찾는 전화가 왔다. 그녀의 엄마였다.
그 날 근무를 마치고 정아는 곧장 집으로 갔다.
"이거 받아라. 아빠가 너 준다고 사왔어."
"장갑 아냐?"
"날씨도 추운데 네가 맨손으로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
야."
"난 거추장스러워서 장갑 안 껴. 엄마나 끼고 다녀."
"엄마 것도 사오셨어. 웬만하면 그냥 끼고 다녀라. 아빠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싫어. 촌스러워서. 장갑 사다 줄 여자 병원에 또 있을 텐
데······."
"무슨 말이야, 그건?"
"요즘 그 사람 행동 이상하지 않아?"
"그 양반 요새 고생이 말이 아냐. 아빠 당부도 있고 해서 내 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글쎄 너 시집 보낼 돈 마련해야 한다고 그 좋
아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으셔. 요즘은 야근 다음날에도 집에서 쉬
지 않고 병원 식당일까지 하시거든."
"병원 식당일을?"
"그럼 넌 몰랐니? 매일같이 얼굴 대하면서······?"
"몰랐어, 정말······."
"글쎄 병난다고 식당일은 하지 말래도 막무가내야. 식당에서 식
기 닦는 일을 거들어주면 식사비도 절약되고 돈도 조금 받는다고 말
야. 너 시집갈 때 쓴다고 일 년 전부터 적금 붓고 있거든."
그녀의 말에 정아는 부끄러워서 더 이상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사람들은 분주했다.
병원 로비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제 몸 가득히 꽃등을 달고 12
월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날은 정아가 야간 근무를 서는 날이었다. 저녁시간쯤에 응급
실 문이 열리더니 병원 뒤편에 있는 갈비탕 집 주인이 들어왔다.
"김정아 씨가 누구세요? 갈비탕 배달 왔는데."
"전데요. 난 갈비탕 시킨 일이 없는데."
"김정아 씨 맞지요?"
"네."
"그럼 틀림없어요. 조금 전에 경비실 아저씨가 돈까지 다 지불
하셨거든요."
그녀는 그제야 새아빠가 그것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갈비탕에서 오랫동안 받아 본 적이 없
는 정 같은 게 느껴졌다. 정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 경비실 쪽으
로 갔다. 그러나 경비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출입문엔 '순찰중'이라
는 푯말이 매달려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을 들여다보았다.
칠이 다 벗겨진 나무 책상 위에는 찌그러진 냄비 하나가 놓여 있었
다. 냄비 안에는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이 하얗게 김을 피워 내고 있었
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 낡은 장갑 하나가 있었다. 오른쪽 짝을 잃
어버린 새아빠의 장갑은 손가락 이음매의 실밥이 터져 있었고 조그
만 단추까지 보기 흉하게 녹슥어 있었다. 그 순간 지난번에 엄마 앞
에 내던져 놓고 온 장갑이 생각났다.
정아는 마음이 아파 차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엇다. 그래서 책
상 위에 있던 메모지에 살며시 자신의 마음을 적어 놓았다.
'아빠! 그 동안 버릇없이 행동해서 죄송해요.'
정문 경비실을 나설 때, 밤하늘에서선 굵은눈발이 날리기 시작했
다. 한 해를 살아오느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 위로 그 해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출처 : 연탄길(이철환 글)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토스트 (0) | 2010.10.16 |
---|---|
타인의 손을 잡는다는 것 (0) | 2010.10.15 |
너를 기다리는 동안 (0) | 2010.10.12 |
할머니의 졸업장 (0) | 2010.10.11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0) | 2010.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