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너를 기다리는 동안

doggya 2010. 10. 12. 07:40

 

 

너를 기다리는 동안

 

 

 

 재원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교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

다. 재원 앞에 앉아서 주머니 속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혜선은 용기

를 내서 말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거니까, 이 돈 오빠가 쓰면 안 될까?"

 "그럴 순 없어. 너도 지금 어렵잖아."

 어렵사리 꺼낸 혜선의 말에 재원은 잘라 말했다. 재원은 등록금

을 마련하고 어려운 집안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을 마치면 중학생 과외를 했고, 10시부터 자정 넘어서까지 편의

점에서 일을 했다.

 일요일마다 두 사람은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혜선은 언

제나 재원의 팔을 끌고 허름한 분식집을 찾았다. 미안해 하는 재원

에게 혜선은 떡볶이, 순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서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추운 거리를 오랫동안 걷고 있었다. 재

원은 추위로 까칠해진 혜선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혜선아, 우리 저기 가서 오뎅 먹고 갈까? 너 배고프잖아."

 "나 배고프지 않아. 이제 집에 갈 건데, 뭐."

 "난 배고프거든. 그러니까 같이 먹고 가자."

 두 사람은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통 앞에 섰다. 얼어

붙은 얼굴로 뜨거운 어묵을 먹으며 혜선이 말했다.

 "오빠, 걸어다니니까 참 기분 좋다, 그치?"
 추운 거리를 내내 걷기만 하고도 그렇게 말해주는 그녀가 재원

은 너무 고마웠다.

 하루는 재원이 고된 일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자정이 훨

씬 넘은 시간에 재원이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으로 혜선이 찾아왔

다.

 "혜선아,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오빠가 그렇게 아픈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

 "교대시간 다 돼서 이제 집에 가서 쉬면 되는데, 뭐."

 얼마 후 근무교대할 사람이 오자 두 사람은 서둘러 편의점을 나

왔다.

 "혜선아, 택시로 빨리 너 바래다 주고 오면, 난 심야 좌석버스 있

거든. 너부터 데려다 줄게. 밤엔 여자 혼자 택시 타는 거 아니래."

 "오빠, 오늘은 아프니까 택시 타고 가. 심야버스 타면 의정부까

지 서서 가야 하잖아. 아픈 몸으로 어떻게 서서 가려고. 오늘은 제발

내 말대로 좀 해. 나는 택시 타면 십오 분이면 가는데, 뭐."

 혜선은 억지로 재원의 팔을 끌며 차도 한쪽으로 가서 택시를 잡

았다.

 "오빠, 내일 새벽엔 도서관 가지 말고, 그리고 이거··."

 혜선은 택시 안으로 들어가는 재원의 주머니에 재빠르게 돈을

넣어주었다. 얼떨결에 택시비를 받았지만 재원은 100미터도 안 가

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혜선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재원이 종로3가 쪽으로 조금 달렸을 때,

혜선은 어둠 저 멀리서 조그만 그림자를 빛내며 걸어가고 있었다.

재원은 빠른 걸음으로 혜선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백 원짜리 동전까지 몽땅 주고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가

는 그녀의 이름을 재원은 차마 부를 수 없었다. 한 시간을 걸어 그

녀의 집까지 가는 동안 재원은 소리없이 혜선의 뒤를 따라 걸어갔

다. 잔뜩 움츠린 몸으로 추운 거리를 걸으면서도 행복하게 웃고 있

을 혜선을 생각했다. 혜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재원의 가슴속으로

따스함이 밀려왔다. 그 순간 오래 전에, 혜선이 했던 말이 재원의 눈

꺼풀 위로 별빛처럼 내려앉았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이 돼주는 거래. 아프고, 또 아파도 온전

히 그의 마음이 돼주는 게 사랑이래.'

 

 

출처 : 연탄길2(이철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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