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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를 오래 씹는 까닭

doggya 2010. 11. 20. 08:40

 

 

포도를 오래 씹는 까닭

 

 

 

                                    세상의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베푼다고들 한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는, 우리 시아버님이 세상이 그런 부모들과는 조금 다른 분이라고 생

각했다. 자식보다는 당신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라고 말이다.

 남편은 시부모님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라면서 그 사실 때

문에 많이 힘들어했고, 나와의 결혼도 쉽지 않았다.

 그 힘든 과정을 거쳐 결혼을 할 무렵, 시아버님은 우리 둘을 불러놓

고 말씀하셨다.

 "너희 둘만 이 세상 사는 거 아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고 원망보다

먼저 이해를 하고 항상 남보다 조금 손해보고 산다고 생각하면, 세상

이 그리 어둡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말씀과 함께 남편에게 통장 하나를 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통장

을 열어보고 마음이 상했다. 결혼하는 아들에게 기왕 주시려면 조금

더 주시지, 겨우 300만 원이 뭐란 말인가. '친아들이 아니라고 이 정

도밖에 안 주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 감정을

남편에게 그대로 말해 버렸다. 아무 말 없던 남편에게도 서운한 기색

이 역력했다.

 그렇게 결혼한 지 3년이 흘렀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시아버님을 뵈

러 시골에 갔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시아버님 드시라고 포도를 사서 드렸는데, 시

아버님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스무 번은 넘게 씹었다가 삼키는 거

였다. 통장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여전했던 나는 에둘러서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님, 저는 아버님처럼 포도를 오래도록 씹어 드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아버님은 정말 건강을 많이 생각하시나 봐요?"

 "건강 생각하느라 포도 한 알을 그리 오래 씹는 줄 아니? 아니다.

어금니가 다 빠져서 그래. 그동안은 앞니로 어떻게든 씹어 드셨는데

얼마 전부터 앞니가 흔들린다고 못 씹으시니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무엇을 얼마나 씹겠니?"

 "그래요? 몰랐네요."

 "내가 성치 않은 이를 뽑으라고 해도 안 들으신다. '뽑고 나서 새

이를 안 해 넣고 다니면 자식들이 부모 이 하나 제대로 안 해준다 어

쩐다 뒷소리가 많다'고. 그게 다 자식 욕 듣게 하는 일이라고 저렇게

몇 개 안 남은 이를 붙들고 사신단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좁은 소갈머리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날,

시보모님께서 숨겨왔던 남편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아무 연고가 없는

줄 알았던 남편에게 친부모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부모님이 남편을 데려다주려고 찾아갔더니, 생부는 그 직전에 세상

을 떠났고 생모는 쌓인 빚을 갚느라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시아버님은 그런 환경에 차마 남편을 두고 올 수 없다면서, "우리가

키우자" 하시면 다시 데리고 왔단다. 그 후 남편의 생모와 가끔 연락

을 하곤 했는데, 생모마저 재혼한다는 말과 함께 남편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시아버님은 남편을 당신의 호적에 올렸고, 아들을 얻은 대가니 당연

히 당신이 갚아야 한다면서 놀랍게도 남편의 친부모가 남긴 빚마저 떠

안으셨다.

 "내가 이 돈을 갚지 않으면 우리 아들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없어."

 시아버님은 무려 31년 동안이나 그 빚을 갚아오셨다. 그래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만 하셨고 당신 건강도, 먹는 것도, 입

는 것도 뒷전으로 미루셨다고 한다.

 마침내 그 많은 빚을 모두 갚으셨지만, 그러다 보니 수중에 돈이 있

을 리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도 알았다. 우리가 결혼할 때, 아버님

이 주신 통장의 300만 원. 이것도 알고 보니 아주버님이 시아버님 틀

니 하라고 주신 돈이었다. 그 돈이 시아버님이 가진 전 재산이었는데,

그것마저 우리에게 주셨던 것이다.이러다 보니 포도를 그렇게 드실

수밖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의 절반이라도 갚

아드릴 수 있을까.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