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별 담은 바구니

doggya 2011. 1. 1. 19:53

 

 

별 담은 바구니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어느 한 철도 푸른빛을 잃지 않

는 덩쿨풀이 있었습니다.

 다른 풀들은 대개가 가을이 되면 속잎마저도 누렇게 시

들었습니다. 그리고 겨울 동안에는 씨앗이 뿌리로 숨을

들이마시고서 매운 바람 찬 눈을 견뎠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 덩굴풀만은 겨울 눈보라 속에 온몸을

파랗게 드러내 놓은 채로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습니다.

 어느 날, 덩굴풀은 바로 위 언덕 벼랑에 살고 있는 소나

무 아저씨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아저씨,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알고말고, 인동초라고들 하지."

 "인동초란 무슨 뜻이에요?"

 "겨울을 참고 이겨 낸다는 말이다."

 "참고 이겨 내면 뭐가 되는가요?"

 "글쎄다······.꼭 쓸 데가 있다고 하던데······."

 "고통을 받지 않고 쓰여질 수는 없는가요? 저는 다른 풀

처럼 겨울잠을 자지 않고 이렇게 떨면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게 여간 괴롭지 않습니다."

 "하기는 그래. 나는 몸집이라도 굵은 나무니까 괜찮지만

넌 너무도 약한 덩굴풀이야. 하지만 어른들이 말하기를

고통이 우리를 완성케 할 것이라더구나. 참고 살아 보

자."

 이듬해 겨울이 물러가자 덩굴풀은 더 많이 뻗었습니다.

꽃을 피워 향기를 날렸습니다.

 어느 꽃보다도 멀리 날아간 덩굴풀 꽃의 향기를 맡고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는 꽃은 꽃대로 잎

은 잎대로 땄습니다. 줄기도 땄습니다. 덩굴은 두고 가려

고 했으나 덩굴마저도 뽑았습니다. 꽃은 말려서 한약방으

로 갔습니다. 잎은 볶아서 차가 되고 줄기는 술로 담가졌

습니다. 그러면 덩굴은 어디에 쓰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작은 바구니로 엮어졌습니다. 인동 덩굴 바

구니는 서울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딸네 집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이 그런 바구니의 의미나 아는가요.

뭐. 그냥 무심히 한쪽켠에 치워져 있다가 플라스틱 바구

니한테 밀려서 버려졌습니다.

 인동 덩굴 바구니는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청소차를 타

고 쓰레기 하치장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습니

다.

 그런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래 속에서 별

을 캐내듯 쓸 만한 물건을 가려 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 가

운데 수녀님 한 분의 눈길이 인동 덩굴 바구니에 머물

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습니다. 인동 덩굴 바구니

는 수녀님의 치마폭에 안겨 작은 판잣집으로 들어갔습

니다.

 다른 수녀님이 수녀님을 반기며 말했습니다.

 "어머, 수녀님. 그 바구니 참 예쁘군요."

 "그렇지요? 어디 소중한 데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주워

왔어요."

 "그래요. 크리스마스 때 아기예수님의 구유로 썼으면 좋

겠군요."

 "맞아요. 우리 이 곳 작은 한 평 성당에 꼭 어울릴 구유로

군요."

 아아.

 인동 덩굴 바구니는 겨울 밤 하늘의 찬란한 별 하나가

기울어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동 덩굴 바구니의 가슴이 마침내 두근거리기 시작하

였습니다.

 

 

출처 : 물에서 나온 새(정채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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