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아름다운 풀

doggya 2010. 12. 29. 09:07

 

 

아름다운 풀

 

 

 

지리산 속 벼랑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풀 한 포기가 살

고 있었어요.

 풀이 이 세상에 얼굴을 마악 내밀었을 때 옆에 있던 곰

취와 바위솔이 수군거렸어요.

 "처음 보는 풀인데. 이 파리가 꼭 무순처럼 생겼어."

 "글쎄 말이야. 콩새가 얼어 죽은 자리에서 나길래 무슨

풀인가 궁금했었는데······."

 "참, 그 콩새는 벙어리였던 것 같아. 먹을 것 하나 없는

 이 높은 산 위에 무얼 하러 왔느냐고 물어도 대꾸 한 번

안 했어."

 "그래, 하얀 눈 위에 맨발로 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던

그 맑은 눈만이 생각나는군. 그래서 나는 콩새가 귀한

풀씨를 물고 왔는가 보다고 생각했지."

 "저렇게 밉게 생긴 풀을 또 보기도 쉽진 않을 거야, 그

지?"

 이렇게 해서 그 날부터 이름이 '미운 풀'이 되고 말았어

요.

 키도 쑥쑥 자라지 않고, 꽃도 예쁘게 피우지 못하는 풀.

 추운 겨울이 오면 다른 풀들은 모두 다음 해 봄이 올 때

까지 긴 잠을 잤어요. 그러나 미운 풀만은 떨면서도 밖에

다 온몸을 파랗게 내놓고 지내야 했지요.

 간혹 사람들이 지나면서 풀섶을 뒤지는 일이 있었어요.

그들은 도회지에다 내다 팔 금난초나 나비난초를 찾아 다

니는 것이었어요. 미운 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요.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겨서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하

는 걸까.'

 미운 풀은 자기를 이 세상에 나게 한 콩새를 원망하며

운 적이 많았어요. 발버둥을 치다가 다리가 꼬이기도 했

어요.

 그러던 어느 해 겨울이었어요. 아침에는 맑았는데 오후

가 되면서 갑자기 눈바람이 몰아친 날이었지요.

 미운 풀은 그 날 숨이 컥 막히는 일을 보았어요.

 산봉우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타던 젊은이가 오도 가

도 못 하게 된 것이에요. 눈보라에 길이 막혀 버렸던가 봐요.

 그러나 젊은이와 함께 산에 온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것이었어요.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데다가 매운

바람마저 더욱 세어졌기 때문이에요.

 이 일을 마침 산봉우리 밑을 지나고 있던 꼽추스님이

보았어요.

 "줄을 마련하시오. 내가 올라가리다."

 "스님께서 어떻게?"

 "걱정 말아요. 내 등은 이렇게 볼록하게 솟아 있기 때문

에 사람을 업기가 더 좋다오."

 "그래도······."

 "괜찮아요. 이런 위험한 일엔 젊은 사람들보다도 나 같

은 사람이 제격인 것이오."

 꼽추스님은 이내 줄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어요. 눈

보라를 헤치고 기절해 있는 청년을 업었어요.

 한 발, 한 발, 아래로 내딛기 시작했어요.

 꼽추스님이 중간쯤 내려왔을 때였어요. 갑자기 센 바람

이 불어 와서 줄이 휘청했어요.

 "악!"

 꼽추스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비

명이 터졌어요.

 꼽추스님의 발이 허공을 내디딘 것이에요.

 벼랑 아래에 떨어진 두 사람 가운데서 젊은이만 숨을

쉬었어요. 다행히도 젊은이의 몸이 꼽추 등에 걸려 있은

덕분이지요.

 그 때 미운 풀은 보았어요. 너무나 잔잔한 꼽추스님의

얼굴을······ 목화솜 같은 포근함이 가득해 있었어요.

 이 날, 이 일이 있은뒤부터 미운 풀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무엇에든지 투정부리지 않았어요. 작은 것들하고 친해

졌어요. 비구름, 눈사람, 산그리메와도.

 한밤중 반짝이는 별하고도 열심히 눈인사를 나누었어

요. 새벽에 들려 오는 아랫절의 염불 소리에도 마음을 다

소곳이 모았어요. 제아무리 매운 눈보라에도 결코 웃음

띤 얼굴을 잃지 않았어요.

 그 날의 햇살은 겨울 햇살치고는 제법 두터웠어요.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미운 풀은 벼랑 아래에서 들려

오는 말소리를 들었어요.

 "아버지, 더 잡수세요."

 "아니다. 나는 이제 배부르다. 네가 마저 먹어라."

 "아니여요. 아버지가 드세요. 저는 정말 배가 부른걸

요."

 돌버섯을 따러 다니는 아버지와 아들이었어요. 둘은 도

토리묵 한 쪽을 놓고 서로 먹으라고 미루고 있는 것이었

어요.

 "아버지, 어머니 병만 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 너희 어머니만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비록 이렇게

돌버섯을 따다 팔고 사는 우리 형편이지만 웃음 부자라

는 소리를 들을 텐데······."

 "아버지, 어머니 병을 낫게 할 약초가 이 산 어디에 없을

까요?"

 "어딘가에 있을 거야. 다만 우리 정성이 부족해서 우리

눈에 아직 띄지 않고 있을 따름이지."

 미운 풀은 저들에게 무엇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

어요.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

 미운 풀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어요. 그러자 미운 풀의

발 밑에 있던 돌 부스러기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굴러 떨

어졌어요.

 다람쥐가 지나가나 싶어서 고개를 젖힌 소년의 초롱한

눈 안으로 미운 풀이 와락 달려들었어요.

 "아버지, 저 풀 참 아름답지요? 한겨울인데도 저렇게 푸

르고 반짝거려요."

 "정말 그렇구나······ 아······ 아니······ 저건!"

 소년의 아버지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황급히 벼랑 위로 기어 올라와서 미운 풀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신령님. 불쌍한 저희에게 이렇게 훌륭한 산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랫골 절에서 울리는 종 소리가 저렁저렁 산 속 깊이

퍼졌어요. 어디선가 콩새의 울음소리도 들려 왔어요.

 

 

출처 : 물에서 나온 새(정채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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