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합니다
아내가 늦던 어느날 저녁 꼬맹이들을 시켜 라면
을 사오게 했다.
"엄마 없으면 아빤 무조건 라면이네."
그럼 동태찌개라도 끓이리. 욘석들. 그래도 라면 조리 하나는 일
품이라 맛나게 먹는다. 도중 둘째가 대뜸 묻는다.
"근데 설거지는 누가 해?"
심심찮게 설거지를 시켰던지라 즐겁지 않은 눈초리다. 안그래
도 점심 설거지도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던 터였다.
"엄마가 늦게 와서 설거지 하려면 힘들텐데, 너네는 어떻게 했
으면 좋겠는데?"
"······"
저 침묵을 깨기 위해 작전을 바꿨다.
"너희 중 엄마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설거지 해."
말이 나가기 무섭게 두 놈 다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내가 할래!"
"아냐, 내가 할래!"
카이~ 작전 성공. 결국 둘이 서로 하겠다고 티격태격하다가 큰
놈이 퐁퐁칠을 하고 작은놈이 헹굼질을 했다.
그런데, 지난 추석 전날 송편을 빚는다고 아내가 쌀을 빻으러 방
앗간을 가면서 왈,
"어머니랑 형님 곧 오신다니까 당신이 거실이랑 방들 청소기 좀
돌려."
"······ 어··· 그러지."
별로 어질러지도 않았는데, 깨끗해 보이는데 그래도 대답을
했으니··· 옳지!
"얘들아, 아빠가 바쁜데 너네가 청소기좀 돌릴래?"
"······"
"너희들 중에 아빠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청소기 돌려라."
"아빠, 나 지금 눈높이 들어야 하거든."
큰놈이 먼저 방으로 내뺀다. 작은놈을 쳐다봤더니 왈,
"아빠, 나도 지금 바빠. 엄마가 한자 쓰고 놀랬어."
이런··· 작전을 바꿨어야 했는데, 결국 청소기는 내가 돌려야
했다.
며칠 뒤 퇴근길, 아파트 놀이터 부근에서 꼬맹이를 만났는데 급
기야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인석이 아빠를 본체만체하는 것이다.
한두 해 전만 해도 우연히 단지에서 마주치면 "아빠~~~!" 하고 달
려와서 안 겼는데, 이게 웬 난리(이거 '난리' 맞다)란 말인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 벤치에 둘이 앉았다.
"길에서 아빠 만나면 안 반갑니?"
"······"
"그래도 아빠 퇴근 하는 길인데 아빠 보고 니가 본체만체하면
아빠 무지 속상하지."
"······"
이게 무슨 일이람. 아니 인석이 길에서 아빠를 보고 이럴 수가
있나···.그날 저녁, 자리에 누워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잘못된
것이다.
"아까 퇴근하면서 승이를 만났는데, 이넘이 날 본체만체 하네."
"그러니가 얘들한테 잘 해."
"아니···.그런 얘기가 아니고···."
"애들꺼 절대 뺏어먹지 말고, 좀 같이 놀아줘. 맨날 자기 혼자 놀
잖아. 반성 좀 해!"
"······"
나는 그 후로 일주일 내내 퇴근길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다녔다.
출처 : 가족만세(전경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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