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죽음에 이르는 병

doggya 2011. 5. 3. 08:55

죽음에 이르는 병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따스할 법도 한데 커튼

을 비끼며 방안을 비추는 볕에서는 전혀 온기를 느낄 수가 없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나고 모락모락 김 오르는 아침상에 옹기종기

식구들이 둘러앉았다면 분명 그 햇살은 더없이 따스했을 것이다.

 하루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전화벨 한 번 울리지 않는 어머

니의 방, 그곳을 비추는 볕에는 생기가 없다. 오직 TV만 혼자 떠들

고 있을 뿐, 젊은 놈도 숨막혀 미쳐버릴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일흔이 다 된 노인네들이 삭막한 콘크리트 아파트에 갇혀서 또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명절에 어머니를 뵈면서 자식놈이라고 참 못할 짓을 하고 있구

나 싶은 생각에 억장이 무너진다. 오십이 안 되어 지아비를 여의고

큰아들마저 먼저 보낸 오마니가 불면의 밤을 보낸 지 벌써 스무 해

가 넘었다. 약을 드셔야만 겨우 주무시는데 찬바람이 불고 철이 바

뀔 때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잠을 못 이루신다.

 하루종일 홀로 지내시다가 새벽녘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그 고통에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언젠가는 뒷산에 올라가셔

서 혼자 엉엉 우셨단다. 후우···.

 

 

 "야야, 그거 오늘 봤다. '왕의 남자.' 두 번이나 봤어. 평일 낮이

라 사람도 별로 없더구나."

 엊저녁, 명보극장에서 아직 영화가 상영하고 있다고 시간대를

가르쳐 드렸더니 오늘 저녁 나절 전화를 하셨다.

 "잘하셨네. 재밌었어요?"

 "응, 그래. 왕하고 걔 누구냐 그 광대랑 노는 게 볼만하더구나.

딴 노인네들은 모두 안 간다고 해서 혼자 가서 봤지 뭐냐. 참 재밌

었어."

 

 

 젊으셨을 때 아버지와 함께 영화란 영화는 모두 보러 다니셨기

에 여전히 영화를 즐기시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거기서 친구도 하나 사귀었지 뭐냐. 나처럼 혼자 온 할배가 하

나 있더구나. 그래서 끝나고 나오면서 새로 영화 나오면 연락 준댄

다. 같이 보기로 했다."

 "아이고, 잘 됐네! 그래 그렇게 댕겨요. 그래야 친구도 사귀지."

 언제부턴가 오마니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내 새끼들~" 하시며

안아보셨다. 그리고 떠나올 때면 "나 한번 안아주고 가라. 응. 안아

주고 가···."

 

 

 정에 주린 큰 눈을 껌뻑이신다. 그 소리에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

던지. 주말마다 가서 하루씩 자고 와야겠다고 하면서도 뜻대로 되

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노인네들끼리 쉬이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외로움 때문일 게다. 온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그 지독한 외로움

을 견디다 못해 노인네들이 간혹 뉴스 한 구석을 차지하지 않나.

그것이 어찌 칠십 노인네들에게만 있겠는가. 부부가 등을 맞대고

사오십 년을 살아도 그 병에 걸릴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어미의 품에서 자라지 못한 새끼의 가슴에 모가 지듯, 정을 나누

지 못하는 인간은 모두가 그 병에 걸리게 되어 있다. 기르던 고양

이가 죽자 그 뒤를 따라가는 한 가닥 줄이 속절없이 '툭' 끊어지

는 날, 이 세상에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는 그 한없는 외로움이 생을

놓아버리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 사이의 정일까보냐.

 한겨울, 보일러조차 돌아가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도 가슴을 뜨

겁게 하는 것. 情이다.

 

 

출처 : 가족만세(전경일 지음)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원으로 산 아들의 행복  (0) 2011.05.06
엄마의 수영복  (0) 2011.05.04
보리밥을 먹어야 할 때  (0) 2011.05.02
세계최대의 열차 사고  (0) 2011.05.01
친구  (0) 2011.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