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두자
녹말가루를 물에 풀었다가 한동안 놓아두면, 가루는 모두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시 맑은 물이 위로 떠 있는 것을 보게 됩
니다.
가끔 너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를 가만히 내버
려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지난 녹말물처럼 온갖
상념이 다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
까 싶어서요.
한 교육자는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한가한 시간을 견디는 힘' 이라고.
한가한 시간, 가만히 있어보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성장
기에 꼭 필요하다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모들은 아
이들을 한 시간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공부해라, 학원
가라, 책 읽어라, 운동해라, 피아노 쳐라······.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는 아이들은 책상 앞에 앉
아서 사시나무처럼 다리를 떨거나 컴퓨터 게임기의 버튼을 미
친 듯이 눌러대야 마음이 오히려 안정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가장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가, 아이들이, 세상이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고요한 호수처럼 쉴 시간이 필요하지만 세상은 무거운 짐
을 진 가장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회사에 가면 정신없이
일해야 하고, 차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는 출퇴근길을 헤치고
다녀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왜 당신은 말이 없냐.' 고 싫은 소
리를 하는 아내에게 시달려야 하고, 아이들은 아빠랑 무언가
하고 싶다 요구하고······.주부들은 주부들대로 정말 딱 하루만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봤으면 좋겠다고 이야
기합니다.
누구나 소설 《좀머 씨 이야기》 속의 좀머 씨처럼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둬!'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처에도 그렇고, 삶에도 그렇고,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에
게도 그렇고,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에게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
람에게도 그렇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습니다. 모두에게는 가
만히 내버려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집처럼, 아물기를 기다
리는 상처처럼, 녹말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이른 새벽처럼······.
출처 : 나를 격려하는 하루 (김미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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