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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안내견

doggya 2010. 5. 31. 10:07

 

 

맹인안내견

 

 

 

 한 가난한 시각장애자 대학생을 주인으로 섬기는 맹인안내견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태극. 주인인 대학생 민호가 지어준 이름이다.

 태극은 안내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민호에게 기증됐다.

민호가 다니는 대학에서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맹인안내견 기

증식'을 가질 때, 태극이 정식으로 민호와 커플이 되었다.

 태극은 안내견학교에서 민호와 처음으로 숙식을 같이하면서 공

동훈련을 받을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속으로 은근히 예쁜

여대생을 주인으로 섬겼으면 하고 바랐으나, 키도 작고 비쩍 마른

말라깽이 민호와 훈련을 받게 되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개를 선택하지 개가 사람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태극은 기증식을 끝낸 다음날부터 등판에 '맹인안내견' 이라는

띠를 두르고 민호와 함께 다녔다 안내견학교에서 배운 대로 주인

의 왼쪽 약간 앞쪽에서 걸으며 주인을 안내해 주었다. 길을 가다

가 장애물이 있으면 피해가고, 피하지 못할 장애물이 있으면 멈춰

서서 주인에게 알려주고, 턱이 있으면 그 앞에 잠시 멈춰 섰다가

건물의 출입문이나 계단으로 안내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태극을 쳐다보았다. "어머머,

저 개 좀 봐" 하고 호들갑을 떠는 여자들을 보면 훈련받을 때와는

달리 괜히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맹인안내견 생활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전동차 안으로 들어서면 "어머, 웬 개?" 하면서 승객들이

반쯤 놀라고 반쯤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태극을 쳐다보았다. 점

심때가 되어 뭘 좀 사먹으려고 할 때도 개는 들어갈 수 없다고 음

식점 문 앞에서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민호가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동안 강의

실 바닥에 조용히 앉아 강의가 끝나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것은 다 견딜 수 있어도 그것만

은 정말 못 견딜 노릇이었다.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라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강의

를 주인을 위해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쭈그리고 앉아 들어야 한다

는 것은 정말 크나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태극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맹인안내견

으로서 진정으로 주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

랑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태극이는 아무리 노력

해도 주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일지 않았다. 사랑은커녕 심술을

부려 주인을 엉뚱한 길로 끌고 가는 짓이라도 하지 않는 것만 해

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태극이는 가끔 민호한테서 멀리멀리 도망가는 꿈을 꾸

었다. 어떻게 하면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시각장애자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

을까 하는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런 어느 날, 태극은 민호의 가장 친한 친구인 경호의 집을 지

하철을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찾아가게 되었다. 그 집은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산동네에 있었다. 흔히 말하는 달동네였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태극을 졸졸 따라

다녔다. 아이들은 심심하던 차에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었는

지 잔뜩 호기심이 동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왜 태극에게

갑자기 돌을 던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별다

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린애다운 단순한 장난에 불과했

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아이가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계속 돌을 던져댔다.

 태극은 화가 났지만 한두 번 던지다가 그만두겠지 하고 모처럼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태극의 그런 속마음도 모르

고 돌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태극은 계속 얻어맞기만 하다가

그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

렸다.

 아, 그런데 바로 그때,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가 태극의 오른쪽

눈을 향해 힘껏 날아왔다. "아!" 하고 소리치는 순간, 태극의 눈에

서 주르르 피가 흘러내렸다. 태극의 비명소리에 놀라 민호가 고삐

의 손잡이를 놓고 아이들을 마구 야단쳤으나, 아이들은 이미 후다

닥 도망쳐버린 뒤였다.

 태극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이 쑤시고 아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응급조치를 하러 찾아간 동물병원 의사가 주인

민호에게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어쩌면 실명할지도 모르겠군요. 망막에 상처가 깊어요."

 이 말이 태극에게 준 충격은 컸다. 태극은 잠뿐만 아니라 입맛마

저 잃고 말았다. 평소 좋아하던 소시지를 건네주어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결국 그 충격은 단순한 충격으로 끝나지 않고 태극에게 실명의

상처를 안겨주었다. 맹인아내견이 그만 맹견이 되고 만 것이다.

 볼 수 없는 세상은 정말 답답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은 어

둠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 주인이 이런 암흑 속에서 살았나 싶

어 태극은 진정으로 주인을 위하지 못한 일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주인의 어둠을 헤아리고 있기에는 태극의 처지가 너무나 참담했

다. 눈먼 사람도 살기 힘든 세상에 어찌 눈먼 개가 살아갈 수 있을

까 싶어 태극은 오직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

각만 하던 태극은 하루하루 야위어갔고, 민호는 혼자 학교를 다니

느라 늘 다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더운 여름날, 민호가 또 어디에서 넘어졌는지 안경

이 찌그러지고 앞니 하나를 부러뜨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술 취한 민호 아버지가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정신 좀 차리고 다녀라. 너 그러다가 이빨 하나

도 안 남겠다. 눈먼 자식 키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이젠 눈먼 개

까지 키우다니, 내 참 기가 막혀서······."

 민호 아버지의 말은 태극을 슬프게 했다.

 "내 아들 좀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했더니. 정작 니가 눈이 멀어?

여보, 이놈 이거 더 이상 비쩍 마르기 전에 아예 보신탕 집에 팔아버

립시다. 아, 오늘이 복날인데 고기 값이라도 건져야 할 것 아니요?"

 태극은 쓸쓸히 죽음을 각오했다. 그동안 자살이라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심한 모멸감이 느껴졌다.

 그때 민호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태극이가 들으면 얼마나 섭

섭하겠어요?"

 그러자 부엌에서 수박을 쪼개다 말고 민호 엄마도 나와서 말

했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갠들 오죽하겠어요? 당신, 농담이라

도 그런 말 하면 죄받아요."

 그러면서 민호 엄마는 수박 한 조각을 태극에게 건네주었다.

 "목마르지? 어이 이거 먹어라. 저이가 술이 취해서 그러니까 아

무 걱정하지 말고, 니가 눈이 먼 게 어디 니 잘못이냐. 다 내 아들

때문이지. 내 다 알고 있다. 그동안 아들을 도와준 일, 정말 고맙

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저이 말을 귀담아 듣지 말거라."

 태극은 민호와 민호 엄마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이 그렇

게까지 자기를 생각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 민호 엄마가 매일 눈먼 태극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

다. 태극은 민호 엄마의 안내를 받을 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황

송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간 탓인지 산책을 할 때마다 바람은 늘 싱그러웠다.

거리엔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는 낙엽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태극은 그동안 맹인안내견으

로 살아온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살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남을 위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태극은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출처 : 스무살을 위한 사랑의 동화1(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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