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나무
백운산 정상에 사는 아기 고로쇠나무가 고개를 들어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들판 멀리 보이는 실낱같은 섬진강 줄기를 따라 아른
아른 아지랑이가 일었다.
"엄마, 봄이 와!"
아기 고로쇠가 엄마 고로쇠를 향해 무슨 큰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 크게 소리쳤다.
"그래, 봄이 오는 소리가 이 엄마 귀에도 들린다. 곧 눈 녹는 소
리가 네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거다."
아기 고로쇠와 엄마 고로쇠가 이런 대화를 나눈 지 며칠 되지 않
아 백운산에 봄이 왔다.
봄이 오자 엄마 고로쇠가 잎도 나기 전에 먼저 연한 노란색 꽃을
피웠다.
"엄마, 나는 왜 꽃이 안 피는 거예요?"
아기 고로쇠는 꽃을 피운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해 꽃을 못
피운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가야, 나중에 너도 꽃을 피울 수 있단다. 좀 기다려보도록 하
거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요?"
"네가 청년이 될 때까지다."
"언제 청년이 되는데요?"
"글쎄, 딱히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단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기
다림이 필요하다는 것 외엔 엄마도 잘 알 수 없단다."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이 적이 실망스러워 불만에 찬 목소리
로 엄마한테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엄마, 엄마는 왜 꽃을 피우는 거예요?"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은 꽃이 없으면 아름다워
지지 않지."
"세상이 아름다워지면 뭐가 좋아요?"
"인간이 아름다워지고, 또 내가 열매를 맺게 되지."
"엄마가 열매를 맺게 되면 뭐가 좋아요?"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가 생기게 되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
리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그럼 엄마, 나도 열매를 맺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엄마도 그걸 원한단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워야 하고, 먼저 꽃을 피우기 위해서
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네, 엄마."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씀대로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꽃은 피지 않았다.
아기 고로쇠는 기다리다 못해 엄마한테 다시 물었다.
"엄마, 나는 왜 기다리는데도 꽃이 피지 않아요?"
"그건 네가 인내 없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기다림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단다."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씀대로 마음속에 인내심을 지니고 꽃
이 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자 어느 해 봄날, 아기 고로쇠는 자신의 몸에 연한 노란색
꽃송이들이 소복소복 피어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엄마, 나도 꽃을 피었어!"
"그래, 너도 이제 청년이 되었구나! 정말 축하한다."
엄마 고로쇠는 아기 고로쇠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아기 고로쇠
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후, 아기 고로쇠는 해마다 꽃을 피웠다. 그런데 어느 해 이른
봄날, 아직 꽃도 채 피우지 않고 눈도 채 녹지 않았는데 백운산 정
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상에 있는 놈일수록 맛이 아주 좋아. 약효도아주 뛰어나지.
위장병이든 신경통이든 관절염이든 아픈 데라면 두루 다 좋아. 오
죽하면 골리수(骨利樹)라고도 했겠나. '나무 수'자 말고 '물 수'자를
써서 골리수(骨利水)라고도 하는데,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마시
고 무릎이 펴졌다는 얘기가 있어. 도선국사가 백운산에서 몇 달
동안 가부좌를 하고 나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무릎이 잘 펴지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바로 옆에 있던 고로쇠나무를 붙들고 일어
서려고 하는데, 그만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그 나뭇가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그걸 마셨더니 당장 무릎이 펴졌다는 거야."
쉰은 족히 넘은 듯한 점퍼 차림의 사내가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또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뜨끈뜨끈한 방에서 오징어나 북어를 고추장에 푹 찍어서 골리
수랑 같이 먹으면 끝내주는 거지. 골리수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없어.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돼. 어이구, 그런 말을 하니 목
이 칼칼한 게 막걸리처럼 한 대접 푹 들이키고 싶네."
아기 고로쇠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서워 얼른 고개를 다
른데로 돌렸다. 그러다가 그만 그들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오호, 요놈 아직 한 번도 물을 안 뺀 아주 어린놈이구나. 넌 아
주 특효약. 특효!"
점퍼입은 사내가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아기 고로쇠
를 보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꺼내
더니 아기 고로쇠의 몸에 "위윙"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드
릴을 갖다대었다. 순간, 아기 고로쇠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아기 고로쇠가 깨어났을 때에는 아기 고로쇠의 몸 여기저기에
사람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아기 고로쇠는 너무 무서워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사
람들이 하는 짓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곧 구멍에다가 비닐 호스를 부착시켰다. 그리고 그 끝
에 커다란 플라스틱 약수통을 갖다놓았다.
곧 아기 고로쇠의 몸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 번씩 밭은
기침을 할 때마다 몸 안에 있던 수액이 울컥울컥 비닐 안으로 흘
러내렸다.
아기 고로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러다가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어 급히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도 맨살에 호스가
꽂힌 채 울컥울컥 수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엄마, 안 아파요?"
"아프지만 참는다. 아가야, 너도 아프지만 참아라."
"엄마,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예요? 엄마, 이건 우리의
피와 눈물이에요."
"아가야, 우리의 피눈물이 사람한테는 약이 된다니까 우리가 좀
참도록 하자."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예요."
아기 고로쇠는 너무나 화가 났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꽃을 피운다고
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엄마의 몸에 상처를 내고 수액을 빼내가고
있지 않는가.
"엄마, 난 약이 되게 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한테 독이 되게 할
거야."
아기 고로쇠는 입을 앙다물고 말했다.
"그러면 안 된다. 아가야, 우리는 조상 대대로 약이 되게 하면서
살아왔어. 그게 우리의 삶이야."
"그래도 난 싫어요."
"아가야, 모든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거야. 희생 없는 사랑은
없어. 사랑한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것이야. 아가야, 울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라. 희생 없는 자비가 어디 있느냐. 자기 몸을 내어주
는 것만큼 더 큰 자비는 없다. 우리는 그런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
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그게 우리 삶의 새로운 의미야."
"아, 알았어요. 엄마, 싫지만, 엄마 말씀을 따를께요."
아기 고로쇠는 엄마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먼 데서 뻐꾸기가 울고 백운산에 봄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약수제'라는 이름의 축제까지 열면서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계속
뽑아 마셨다.
그것이 고로쇠나무의 자비와 사랑인지도 모른 채······.
출처 : 스무살을 위한 사랑의 동화1(정호승)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 경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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