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갈 길이 총총하다

doggya 2010. 8. 6. 06:58

 

 

갈 길이 총총하다

 

 

 

남을 도울 수 있는 큰 기회가 우리 앞에 오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 샐리 코흐

 

 

 작년 어느 봄날이었다. 조치원에 볼일이 있어 네댓새 묵다가 돌

아오는 길이었다. 천안역에 이르렀을 때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

는 일흔이 넘은 듯한 노인이 탔다.

 그 노인 옆 좌석에는 말쑥한 청년들이 웃어대며 달걀은 '에그'라

고 한다네.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승강구 입구에서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열서너 살쯤 돼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느 신사

앞에서 꾸벅 절을 하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이 많고 차 소리

가 시끄러워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

가 손을 내밀었지만 누구 하나 돈 한 푼 주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여자 아이가 일흔 살이 넘은 듯한 그 노인 앞에 와서 노

래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여자 아이의 얼굴을 한참 바라

보다가 물었다.

 "얘, 너의 집이 어디냐?"

 "성환이에요."

 "아버지 계시냐?"

 "병으로 누운 지가 여러 달이에요."

 노인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지갑을 열었다. 단돈 1만 원

한 장뿐인 모양이다. 그 돈을 다시 쳐다보더니 노인은 선뜻 내주

었다. 여자 아이는 1만 원을 받고 노인의 속뜻을 몰랐던지 그 노인

에게 도로 내밀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 다 가져도 된다. 이 다음엔 동냥하지 않게 돼야지."

 여자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울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갔다.

이때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들이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할아버지, 돈이 얼마나 많아서 1만 원씩이나 주세

요?"

 노인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보게, 내가 잘못한 게 있단 말인가? 그 애가 하도 딱해서 내

버스값 생각도 않고 다 주었는데 무슨 시비요?"

 "그런 애들은 돈을 주면 버릇이 돼서 기차만 쫓아다닌단 말이에

요. 그런 돈 주지 말고 공장이라도 세워서 그런 불쌍한 애들을 도

와 주면 좋지 않겠어요?"

 노인은 한 번 크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같이 계획이 원대한 사람들은 공장을 세워서 그런 애들

을 수백 명 돌봐 줄 걸로 믿소만, 나 같은 노인은 갈 길이 총총해

서 공장을 지을 시간이 없구려." (글 : 고제원(구멍가게 경영))

 

 

출처 : 작은 이야기(정채봉 ·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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