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모습
1985년, 나는 인도의 캘커타에 있었다. 이 세상의 끝, 인간의
온갖 더러운 모습이 다 있는 곳. 그리고 극도의 무질서와 무더위
가 우글거리는 곳 캘커타···.
벵갈리 마켓 부근의 빈민촌에 인도 절이 있길래 거길 찾아갔다.
반기는 것은 오직 무더위뿐. 사방이 벽으로 막혀 버린 이 수용소
같은 방에 머물 생각을 하니 기가 찼다. 모기떼와 엎치락뒤치락하
다가 날이 새었다. 가는 햇살이 갈라진 벽 틈으로 들어와 발에 꽂
혔다. 또 고생이 시작되는구나···.나는 아득한 생각에 젖어 얼마
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누가 열려진 문으로 들어왔다.
50대 일본인이 제대로 맞지도 않는 바지에 소매가 짝짝이인 와
이셔츠를 구겨 입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 순간 거지가 돈
달라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지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요?"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그
러나 그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었다. 거지는 자기 소개를 했다. 그
는 산티니케탄에서 산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거지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의 청소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시인 타골이 세웠다는 오두막집 대학 산티니
케탄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틴케탄으로 가는 길
을 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부근의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그곳은 마치 쓰
레기와 세균의 집합장 같았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골목길들을 이
리 돌고 저리 휘어 가면서 그는 차이나타운의 이모저모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인도에서 27년째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는 손국수를 사고 싶은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손국수를 파는 곳은 없었다. 이렇게 찾
아 헤매이길 무려 세 시간, 나는 지치고 화가 났다. 느닷없이 나타
난 웬 일본 거지가 손국수 하나로 나를 이렇게 골탕먹이고 있는가
싶어 울화가 치밀었다. 겨우 손국수 파는 곳을 발견하자 그는 너
무너무 좋아했다. 드디어 손국수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 사
람 몫의 손국수를 사들고 그는 나와 헤어졌다. 내일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이튿날 나는 어렵게어렵게 산티니케탄 지나바반을 찾아갔
다. 마키노(그의 이름)를 찾자 인도 여학생들은 대번에 마키노라
는 이름 뒤에 '교수님'을 붙였다. 그는 산티니케탄 타골 대학교의
일본어과 주임교수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
나 옷은 역시 짝짝이인 어제 그 옷이었다.
그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인도의 밤. 먼 곳에서는 그리움처럼 불이 켜지고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탁(조그만 앉은뱅이 나무책상)에 앉은 나는 놀랐다.
어제 그가 그토록 사려고 헤맸던 손국수는 바로 오늘 자기 집 손님
으로 오는 나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무엇앤가 한 대 세
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발 씻을 물을 주고 잘 자리를 준비해 주는 그들 부부의 정성 어
린 태도는 집 나간 아들을 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침. 마키노 교수는 조그만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렸다. 부인은 작은 소꼽놀이 그릇에 다섯 알쯤 되는 밥풀을 담
아 가지고 와서 신상 앞에 놓았다.
나는 뒤에 앉아서 마키노 선생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그에게
는 전혀 꾸밈이 없었다. 교수라는 권위도 지식인의 오만도 그에게
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여기 오직 간절하고 조그만 한 인간이 지금 내 앞에서 기도를 드
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바로 저것이었구나.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모
습은 바로 저것이었구나. 바로 저 겸허하고 절실한 한 인간의 모
습이었구나.' (글 : 석지현(스님))
출처 : 작은 이야기(정채봉 ·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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