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총총하다
남을 도울 수 있는 큰 기회가 우리 앞에 오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 샐리 코흐
작년 어느 봄날이었다. 조치원에 볼일이 있어 네댓새 묵다가 돌
아오는 길이었다. 천안역에 이르렀을 때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
는 일흔이 넘은 듯한 노인이 탔다.
그 노인 옆 좌석에는 말쑥한 청년들이 웃어대며 달걀은 '에그'라
고 한다네. 어쩌고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승강구 입구에서
다 떨어진 옷을 걸친 열서너 살쯤 돼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느 신사
앞에서 꾸벅 절을 하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이 많고 차 소리
가 시끄러워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
가 손을 내밀었지만 누구 하나 돈 한 푼 주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여자 아이가 일흔 살이 넘은 듯한 그 노인 앞에 와서 노
래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여자 아이의 얼굴을 한참 바라
보다가 물었다.
"얘, 너의 집이 어디냐?"
"성환이에요."
"아버지 계시냐?"
"병으로 누운 지가 여러 달이에요."
노인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지갑을 열었다. 단돈 1만 원
한 장뿐인 모양이다. 그 돈을 다시 쳐다보더니 노인은 선뜻 내주
었다. 여자 아이는 1만 원을 받고 노인의 속뜻을 몰랐던지 그 노인
에게 도로 내밀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 다 가져도 된다. 이 다음엔 동냥하지 않게 돼야지."
여자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울듯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갔다.
이때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들이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할아버지, 돈이 얼마나 많아서 1만 원씩이나 주세
요?"
노인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보게, 내가 잘못한 게 있단 말인가? 그 애가 하도 딱해서 내
버스값 생각도 않고 다 주었는데 무슨 시비요?"
"그런 애들은 돈을 주면 버릇이 돼서 기차만 쫓아다닌단 말이에
요. 그런 돈 주지 말고 공장이라도 세워서 그런 불쌍한 애들을 도
와 주면 좋지 않겠어요?"
노인은 한 번 크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같이 계획이 원대한 사람들은 공장을 세워서 그런 애들
을 수백 명 돌봐 줄 걸로 믿소만, 나 같은 노인은 갈 길이 총총해
서 공장을 지을 시간이 없구려." (글 : 고제원(구멍가게 경영))
출처 : 작은 이야기(정채봉 · 류시화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