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나는야 아이스께끼 장사

doggya 2010. 8. 10. 09:21

 

 

나는야 아이스께끼 장사

 

 

 

몽당 크레파스를 가지고 방에 엎드려 열심히 그림 숙제를 하고 있

을 때였다.

 "이 크레파스 누구 거냐?"

 엄마는 함치르르한 금색과 은색 크레파스를 손에 들고 내게 물었다.

 "······."

 "네 크레파스엔 금색과 은색이 없잖아. 이거 누구 거야?"

 "친구 크레파스야."

 "빌려온 거니?"

 "아니······."

 "그럼 친구가 준 거니?"

 "아니······."

 "그럼 뭐야? 친구 걸 그냥 가져왔단 말이야?"

 엄마는 해쓱한 얼굴로 두 번을 거푸 물으며 종주먹을 쳐댔다. 에

두러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데

쳐낸 미나리처럼 뒤가 저린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때, 곁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조그만 놈이 벌써 남의 물건에 손을 대? 그런 돼먹잖은 짓을 어데

서 매웠어. 동티내는 놈 치고 내 잘되는 놈 하나도 못 봤다. 이놈아,

어서 가서 회추리 가져와!"

 그날 나는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을 맞았다. 눈물을 찔끔찔끔

짜며 나는 고물상 박으로 나왔다. 피멍이 푸르뎅뎅하게 배어난 종아

리를 보니 가시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따가웠다. 횟배까지

끓어올랐다.

 식구들 몰래 아이스께끼 장사를 했던 나는 제 시간에 아이스께끼

대리점에 도착하기 위해 마음이 급했다. 호흡도 고르지 못한 채 대

리점에 도착했을 때 덩치가 산만한 형이 네모난 아이스께끼 통 안에

께끼와 하드를 한 웅큼씩 쟁여 넣고 있었다.

 "그거 제 아이스께끼 통인데요."

 "인마, 내 꺼야."

 전갈꼬리 같은 눈썹에 눈두덩이 소스라진 그 형이 거북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제 껀데요."

 "넌 이거나 써."

 형은 어기찬 말을 식식 내뱉으며 낡은 아이스께끼 통을 내게 내밀

었다. 낡은 아이스께끼 통은 기능이 신통찮아서 번번이 께끼와 하드

를 녹여놓기 일쑤였다.

 "제 꺼 주세요."

 "이 자식, 왜이렇게 까탈스러워. 뻗대지 말고 저리 꺼져. 이 물렁

팥죽 같은 놈아."

 개구지게 생긴 형은 무 밑동 같은 주먹으로 왁살스레 내 얼굴을 때

렸다. 코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떠름한 얼굴로 입만 종깃종깃하다가

누런 휴지로 코를 틀어막았다. 이를 앙그려 물고 낡은 아이스께끼 통

을 어깨에 메고 대리점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못된 형들의 고시랑거

리는 소리와 함께 이기죽거리며 웃는 소리가 서늘하게 들려왔다.

 "아이스께끼! 께끼나 하드, 아이스께끼, 께기나 하드."

 나는 추레한 얼굴로 무거운 아이스께끼 통을 어깨에 메고 이 거리

저 거리 죽살이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해가 설핏할 무렵 들꽃 같은

집들이 줄레줄레 늘어선 조붓한 골목길도 헤매 다녔다. 그런데 운수

사납게도 동네 친구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얘 잠깐만, 하드 좀 줄래?"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 봄나물같이 향긋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렀다.

 "하드 세 개만 줘라. 근데 코는 왜 다쳤니? 종아리도 온통 피멍이

들었고. 쯧쯧, 너무 아프겠다."

 아줌마는 안쓰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

던 꼬마 아이는 아버지에게 맞아 피멍든 내 종아리를 바라보며 눈쌀

을 찌푸렸다. 푸르딩딩한 코를 틀어막았던 누런 휴지를 나는 얼른

빼 버렸다.

 "고맙습니다."

 가만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줌마의 손을 잡고 어정버정 걸어가는

해말쑥한 아이의 뒷모습이 저녁노을에 선연해 보였다. 가까운 곳에

서 노란 국화빵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들먹한 뚝배기

에 순댓국을 먹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도 보였다. 곱던 저녁노을도 가

뭇없이 사라졌고 사방엔 어둠이 푸르게 내려앉았다. 몹시 헛헛했다.

 아이스께끼 통을 대리점에 갖다 주고 나서 나는 서둘러 길음시장

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이 바지 얼마예요."

 "그거 어른 거야. 너는 커서 못 입어."

 할머니는 아무 속내도 모르고 고드름장아찌 같은 표정을 지어 보

였다.

 "제가 입을 게 아니고, 아버지 드릴 건데요."

 "그래? 아버지 드리는 거니까 내 싸게 줄게. 인정도 품앗이라잖

냐."

 할머니는 우익살스런 손으로 다른 바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때 옆

가게에 있던 오지랖이 넓어 보이는 젊은 아줌마가 오종종한 얼굴로

도갓집 강아지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이고 마. 미아리에 효자 났네. 이 바지 미군들 입는

군복에 물들인 건데 봄에는 구접스레 보여도 고래힘줄같이 질겨서

천년만년을 입을 거고마. 니 참말로 찰지고 암팡지게 생겼데이."

 "마산댁, 객쩍은 소리 그만 해. 어린애한테 그렇게 입찬소리 하는

거 아녀."

 

 아버지에게 줄 바지를 사들고 시장 길을 걷는 내 마음은 설레여

잔뜩 두둥실 부풀었다.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돌맹이 하나가 빠져나

간 기분이었다.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는 고물

상 문을 들어섰다. 아버지도 흐린 알전구 밑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계셨다. 고운때가 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까칠해 보였다.

 "아버지, 이거요."

 나는 수줍은 얼굴로 슬그머니 바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아버지 작업복이에요. 아버지 작업복에 구멍이 많이  났잖아요.

미군 군복을 물들인 거라서 떨어지지도 않는대요."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무슨 돈이 있어서 이걸 사왔어?"

 "저어······.이 주일 동안 아이스께끼 장사 했어요. 아버지에게 바

지 사다 드리고 싶어서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고, 내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점

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빛도 슬퍼보였다. 아버지는 허리를

숙여 꽃밭 같은 가슴으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주 오랫동안 나를 끌어

안고 계셨다. 피멍 든 내 종아리를 아프게 아프게 어루만지면

서······.

 

 

출처 : 행복한 고물상(글 : 이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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