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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수박귀신

doggya 2010. 8. 19. 09:38

 

 

추억의 수박귀신

 

 

 

 형과 장난을 치던 내가 무슨 일엔가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그래

서 나는 누워 있던 형의 양팔을 내 무릎으로 꽉 누른 채 씹고 있던

껌을 형의 눈썹에 붙여 버렸다. 길길이 날뛰는 형을 피해 나는 무작

정 밖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내가 방 안을 기

웃거렸을 때였다.

 "눈뜨지 마, 눈뜨면 장님 될 수도 있어."

 아버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 너머로 슬쩍 들여다보니 아

버지가 형을 무릎 위에 눕혀 놓고 마른 수건으로 형의 눈썹을 닦아

내고 계셨다. 순간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맞을 매라면 차라리 일찍 맞는 것이

더 나으리란 판단에 나는 없던 용기까지 내어 방문을 열었다. 스르

르 방문을 여는 순간 방 안에서 톡 쏘는 휘발유 냄새가 휘 하고 풍겨

왔다.

 "이 못된 녀석, 형 눈썹에 껌은 왜 이리 떡칠해 놨어?"

 나를 본 아버지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을 치셨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는 페인트 희석제인 시너를 수건에 묻혀 형의 눈썹에 달

라붙어 있던 껌을 살살 문지르고 계셨다. 아버지의 그런 수고로 껌

뭉치는 형의 눈썹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 녀석, 도대체 껌을 몇 개나 붙인 거야, 응?"

 아버지가 더욱더 화가 난 표정으로 물으셨다. 잔뜩 풀이 죽어 있

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한 개요."

 "이놈이 이젠 거짓말까지 해? 껌 하나가 이렇게 주먹만 해?"

 아버지는 수건에 묻어 나온 껌 뭉치를 들어 보이며 소리치셨다.

 말대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졸지에 거짓말쟁이로까지

몰린 게 억울해서 나는 퉁퉁거리듯 중얼거렸다.

 "풍선껌이었는데요."

 순간 누워 있던 형이 쿡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어이가 없

었는지 아버지도 따라 웃으셨다. 그 바람에 어쨌든 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며칠 뒤였다.

 갑자기 배가 아파 나는 냅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커다란 널빤지로

동서남북을 가려 만든 우리 집 화장실은 얼마 전 아버지께서 손수

만드신 거였다. 비록 아직 천장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옹색한

곳이었지만 매일 같이 줄을 서야 하는 공동 화장실에 비하면 무척이

나 으리으리한 곳이었다.

 내가 한참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딘

가에서 큭큭거리는 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이야?"

 ""그래 형이다, 어쩔래."

 퉁명스런 형의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낄낄거리는 형의 웃음소리

가 들려왔다.

 "허파에 바람이 났나, 뭐가 그렇게 재밌어?"

 "수박귀신."

 "수박귀신?"

 "응."

 나는 별 싱거운 소릴 다 듣겠다는 투로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

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형이 조용히 물었다.

 "너 수박귀신 한번 볼래?"

 "수박귀신은 무슨······."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나는 무슨 헛소리냐며 대화를 일축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박귀신이닷!" 하는 형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뻥 뚫린 화장실 천장 위로 엄청난 크기의 수박이 떨어지는 것

이었다.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나는 잠시 정신을 잃는 듯했다. 가만히 눈을 떠

보니 좁은 화장실 바닥에 이미 조각난 수박껍데기들이 잔뜩 널브러

져 있었다. 내 머리와 얼굴에도 벌건 수박 물과 함께 검은 수박씨들

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형이 조금 전 함께 파먹던 수박을 통째로 화

장실 안으로 집어 던진 것이었다. 며칠 전에 벌어졌던 껌 사건에 대

한 무시무시한 복수였다. 그날 밤 나는 정말로 무슨 귀신이라도 만

났던 듯 심한 경기를 일으키며 잠을 설쳐야만 했다.

 비록 철은 없었지만 늘 마르지 않는 사랑의 우물가에서 마냥 행복

했던 우리 형제였다.

 

 

출처 : 행복한 고물상(이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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