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치와의 전쟁
할머니께서는 참으로 인자한 분이셨다. 초등학교 적 방학만 되면
나와 형은 늘 시골로 갔다. 방학 때면 나타나 시골동네 여기저기에
말썽을 피우던 우리 형제에게 할머니는 얼굴 한 번 찡그린 적이 없
으셨다.
할머니 댁 바로 아래에 살고 있던 은실네 집에는 '깜치'라고 하는
크고 무시무시한 잡종 도사견 한 마리가 있었다. 시커먼 얼굴에 쫑
긋한 귀, 툭 불거져 나온 눈, 거기다 녀석이 굵은 꼬리를 추켜올릴
때면 녀석은 마치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낯선 우리를 보고 짖어대
는 무시무시한 그 녀석이 두렵기도 했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깜
짝깜짝 놀래키는 녀석이 얼마나 얄미웠던지, 하루는 부아가 난 형이
개집에 묶여 있던 깜치를 향해 먹고 있던 찐 고구마를 슬그머니 던
져주었다.
"캑! 깨갱 깽깽······."
뜨거운 고구마를 한입에 집어삼킨 깜치는 화들짝 놀라 툭 하고 고
구마를 내뱉었다. 형은 시치미를 뚝 뗀 채 짐짓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했다. 그러고는 뒷짐까지 지며 제법 호기 있는 목소리로 "짜
식 별것도 아닌 게 까불어." 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며칠 후였다. 아랫집 은실아버지가 강에서 커다란 꺽지를 잡아왔
다는 소릴 듣고 우리 형제는 조심스럽게 은실네 집 담장을 기웃거렸
다. 다행히 깜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은실아, 은실아."
내가 조용히 은실이를 불렀다. 하지만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없나 본데."
슬그머니 개집을 바라보던 형이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갈까?"
내가 물었다.
"그래."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세찬 바람이 한 줄기 불더니 '삑······ 삐거덕······.' 하
는 소리와 함께 은실네 부엌문이 바깥쪽으로 스르르 열리는 것이었
다. 우리들의 눈동자는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옮겨졌다.
"으르르릉······."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깜치였다. 깜치가 침을 질질 흘리
며 괴물처럼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깜치닷! 튀엇······."
형이 소리쳤다.
"엄마야!"
우리들은 비명을 지르며 냅다 도망쳤다.
"왕왕, 왕왕······."
깜치가 사정없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며 짖어댔다. 나는 할머니 댁
으로 형은 논두렁 쪽으로 달렸다.
"엄마야! 살려줘!"
깜치가 자신이 뒤를 바짝 쫓는 것을 알아차린 형이 다시금 비명을
질러댔다. 아마도 깜치는 며칠 전 자기에게 뜨거운 고구마를 던져주
었던 국방색 바지의 형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꽁지가 빠져라 하
고 달리던 형은 도랑 옆 대추나무 가지 위로 재빠르게 올라섰다. 마
른침을 꼴깍 삼키던 나는 형이 무사히 나무 위로 올라가 주기만을
바랐다.
"왕왕, 왕왕······."
"꺄악, 엄마!"
형이 다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깜치가 형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크르릉 큭!"
당황한 형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안간힘을 다해 깜치
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사견의 피가 흐르는 깜치가 쉽게 물러
설 리가 없었다.
"으악! 꺅!"
나는 차라리 형의 바지가 찢겨나가길 바랬지만 군복을 줄여 만든
바지는 생각보다 질겼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형, 바지를 벗어 버려! 바지를."
그러자 워낙 다급했던지 형이 한쪽 손으로 잽싸게 바지를 내렸다.
품이 큰 바지라 형이 꼼지락거리는 대로 바지는 쉽사리 내려갔다.
순간 형의 바짓가랑이가 깜치의 얼굴을 덮었다. 화가 난 깜치는
물고 있던 바지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아까보다 더욱더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왕왕, 왕왕······.크르르르."
있는 대로 약이 오른 무시무시한 깜치의 입가에서 하얀 거품이 뚝
뚝 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여름이면 땀띠가 유난히 심한터라
형은 아예 속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으악!"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형이 소리 지
르기 시작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르 참으며 이렇게 외
쳤다.
"형, 잠깐만 있어! 내가 할머니 불러올게! 떨어지면 끝장이야, 알
았지? 꼭 잡고 있어."
그때였다.
"깜치!"
갑자기 어른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실아버지였다. 은실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나무 아래에서 킁킁거리
고 있던 깜치가 침을 뚝뚝 흘리며 아저씨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꼬리를 바짝 내리고는 슬그머니 아저씨 옆에
쭈그려 앉는 것이었다. 기세등등하던 조금 전과는 생판 다른 모습이
었다.
바람이 쏴 하고 불자 대추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렸다. 웃음소리
가 들려 가만히 보니 아저씨 등 뒤에서 누군가가 킥킥거리고 있었
다. 은실이었다.
아랫도리를 훤하게 내놓은 채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는 형의 모습을 은실이가 본 것이다. 몹시 난처했
는지 형은 마지막 힘을 다해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뭇
가지에 꽈배기를 한 채 은실이를 향해 소리쳤다.
"눈 깔아! 씨이."
착한 은실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형
이 다시 고함쳤다.
"철환아! 빨랑 바지 가져와, 빨랑."
그날 저녁 밭에서 딴 싱싱한 오이라며 은실아버지가 오이 한 광주
리를 가져왔다. 은실아버지는 비실비실 웃으며 형의 귀에 대고 뭔가
를 소곤거렸다. 아저씨가 돌아간 뒤 내가 형에게 물었다.
"형, 아까 은실아버지가 뭐라 그런 거야?"
"다음에 정말 깜치가 물면 깜치 귀에다 대고 바람을 불어넣으란
다. 그리고 바지 빨아 놓았으니 내일쯤이면 마를 거라나 뭐라나."
"귀에다 바람을? 어! 그러면 되는구나."
잠시 뒤 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철환이 너, 앞으로 은실이 그 계집애랑 놀지 마. 알았지?"
출처 : 행복한 고물상(이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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