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죽과 하모니카
"미선아,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맛있는 잣죽 끓여서 곧 갈
테니까 말이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최 노인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다.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잣죽을 끓이고 있기 때
문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맛있게 됐다. 먹고 싶지? 조금만 기다려.
이제 갈게."
최 노인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며 맛있게 끓은 잣죽을 보온병
에 조심히 따랐다.
"자, 다 됐다."
최 노인은 한 손에 보온병을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직 날
이 세지 않아 앞이 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할아버지, 오늘도 가세요?"
어둠 속에서 낮익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가야지. 우리 마누라 아침 줘야지."
"하여간 대단하시네요. 몇 년째예요. 한 십 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그런가?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나? 허허. 자네는 어디 가나?"
"예, 장에 배추 좀 내다 팔려고 일찍 일어났어요."
"그래, 수고하게. 나 먼저 감세."
지금 최 노인은 아내에게 가는 길이다.
아내가 잠들어 있는 곳은 집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지만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곳에 간다. 큰 장마에 마을의 다리
가 끊어져도, 폭설이 내려서 길이 험해져도 단 하루도 거르지 않
고 그 강을 건너 아내에게 갔다.
장터 입구에 도착할 무렵, 어느덧 날이 밝아 왔다. 국밥집 아줌
마가 최 노인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늘도 정각 일곱 시에 우리 가게를 지
나가시네요."
"그런가? 하하하."
최 노인은 웃음으로 대신 인사를 하고 다시 갈 길을 갔다. 가을
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아침 바람이 꽤 매서웠다. 최 노인은 외투
의 옷깃을 세우고 더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아무리 보온병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만큼 잣죽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조
금이라도 따뜻한 잣죽을 아내에게 먹이고 싶었다.
"미선아, 조금만 기다려."
집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최 노인은 자그마한
산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라 숨이 턱까
지 차지만, 최 노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산을 올랐다.
"휴 ···.미선아, 나 왔다. 어젯밤에 잘 잤어?"
최 노인은 보온병에서 잣죽을 뚜껑에 따라 아내의 산소 앞에 놓
았다.
"미선아, 식기 전에 먹어."
최 노인은 아내의 산소 옆에 앉은 후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
내 입에 갖다 댔다.
"하모니카 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했지? 오늘은 새로운 곡을 연
주해 줄게. 그동안 틈틈이 연습했는데 잘될지 모르겠네."
삐삐뿌뿌.
삐삐뿌뿌.
하모니카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정겹기도 하고
구슬프기도 했다. 최 노인은 하모니카를 죈 손이 시려 올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래그래. 잘 먹는다. 우리 미선이 잘 먹는다. 음, 이제 늦었으
니 가야겠네. 내일 또 올 테니까. 잘 지내고 있어. 무섭다고 울지
말고, 알았지?"
어느새 최 노인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래, 알았어. 내일은 더 맛있게 끓여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
지말고."
최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자꾸만 멈춰졌다.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발
길을 재촉해 보지만 어느새 다시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도 최 노인은 아내가 있는 데쯤을 한참 바라
보았다. 그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요,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평생 맛있는 잣죽을
끓여 주겠다는 약속, 하모니카를 불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줘서
고마워요."
최 노인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집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를 만나고 돌아가는 최 노인의 뒷모습
이 그리 쓸쓸해 보이진 않았다.
누구나 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수많은 약속을 합니다. 영원히 사랑
할게, 늘 너를 지켜줄게, 언제나 너의 편에 서 줄게, 세상에서 가장 널
돋보이게 할게 등등···.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약속은 점점 원
래의 빛을 잃어버리고 퇴색되고 맙니다. 당신은 지금 약속을 잘 지키
고 있습니까?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이고, 행동 이전에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약속을 영원히 잊지 마세요.
출처 : 엄마, 정말 미안해(김현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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