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남편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지혜는 잠시 방문 앞에 멈춰섰
다. 그림을 좋아했고 아이처럼 착하게 살다간 남편 영민이 어
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눈을 감고 앉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가슴에 안겨있던 아이가 내 마음을 아는지 뒤척였
다. 지혜는 두려운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아무
도 없었다. 어둠만이 지혜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지혜는 영민이 사용하던 책상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의자
에 앉아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화구며 캔버스에 고스란
히 남아있는 영민의 숨결이 느껴졌다. 가슴 아팠다. 아픔의 흔
적을 지혜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이이 맑은 눈을 바라보
며 영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혜야, 미안해. 너하고 아기만 남겨놓고 나 먼저 떠나가
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줘.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아기 첫돌이 되는 날, 내 책상 첫번째 서
랍을 열어봐. 그곳에 노란 봉투가 있거든 그걸 아기에게 선물
해줘.'
지혜는 영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랍열쇠를 꺼내들었
다. 열쇠를 꽂는 순간 지혜의 조그만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
고 서럽 속에 가지런히 놓인 커다란 봉투를 꺼냈다.
"아가야 아빠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너의 첫번째 생일날
주라고 하셨거든."
지혜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하지만 봉투를 열
고 안을 들여다본 순간 더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봉투 속
엔 남편이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림 오른쪽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남편 영민이 앉아있었다. 그림 오른쪽엔 지혜가 앉아 있
었고, 그들 사이엔 어여쁜 아기가 백일홍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영민은 아기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림 속 아기의 얼굴은 영
민의 얼굴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었다. 봉투 속엔 그림과 함
께 예쁜 강아지 인형과 돌반지, 그리고 분홍색 편지 한 통이
들어있었다.
아가야, 오늘이 네가 세상에 태어나 맞이하는 첫번째 생일이야. 그래서 아
빠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런데 너와 함께 있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아빠가 곁에 있었으면 동물원
도 데려가고 예쁜 사진도 찍어줬을 텐데.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의 손을 꼭 잡
고 있을 거야. 네가 눈물을 흘리면 맑은 바람이 되어 너의 눈물을 씻어주고, 네
가 삶에 지쳐 쓰러지면 네 등을 쓰다듬는 따스한 바람이 되어줄께.
그리고 너를 보살피는 엄마의 힘겨운 걸음걸음마다 아빠는 늘 함께 할거
야. 아가야,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돼. 아빠는 별빛으로, 바람으로, 때로는
따스한 햇살로,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아가야, 안녕.
-하늘나라에서 너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가
지혜는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예쁜
강아지를 쥐고 있는 아기의 손가락에 아빠가 선물해준 반지를
끼워주었다.
"아가야, 아빠가 너에게 선물해준 거야."
지혜는 아빠를 닮은 아기 얼굴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혜의 귓가로 오래 전 영민이 읽어준 『샘터』의 표지
글이 영민의 사랑과 함께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했다.
만년설을 이고 선 히말라야의 깊은 산골 마을에 어느 날 낯선 프랑스 처녀
가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다음 날부터 마을에 머물며 매일 마을 앞 강가에 나
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몇 십 년이 흘러갔
습니다. 고왔던 그녀의 얼굴엔 어느덧 하나둘 주름살이 늘고 까맣던 머리칼도
세월 속에 허옇게 셌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기다림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러던 어느 봄날,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강가에 앉아있는 그녀 앞으로 상류로
부터 무언가 둥둥 떠내려 왔습니다. 그것은 한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바로 여
인이 일생을 바쳐 기다리고 기다린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은 히말라야 등반을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된, 여인의 약혼자였습니
다. 그녀는 언젠가는 꼭 눈 속에 파묻힌 약혼자가 조금씩 녹아, 흐르는 물줄기
를 따라 떠내려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 산골 마을 강가에서 기다렸던 것입니
다.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녀는 약혼자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입을 맞추며 울었
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을 바쳐 마침내 그 사랑을 이루었습니다.
지혜는 아기를 꼬옥 안았다. 먼길을 떠나온 초저녁별 하나
가 방 안으로 해쓱한 얼굴을 디밀더니, 얼굴을 맞댄 모녀의 가
슴 가득히 영민의 사랑이 쏟아져 내렸다.
"아가야, 슬퍼하지 마. 아빠는 이렇게 우리 곁에 있잖아. 우
리가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아빠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거야. 곁에 있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는 게 사랑이래······."
출처 : 반딧불이(이철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