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가장 노릇

doggya 2010. 9. 26. 07:50

 

 

가장 노릇

 

 

 

   "당신, 이제 주무세요."

 "괜찮아. 난 아직 멀었으니까 먼저 자."

 국 씨는 오늘도 하얗게 날을 지새울 모양이다.

 "몸도 좋지 않은 양반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몸이 안 좋으니까 더 노력해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 있지.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

 "알았어요. 너무 오래하지 말고 주무세요."

 국 씨는 몸을 비틀어 가며 가운뎃손가락으로 겨우 책 한 쪽을 넘

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일 초도 걸리지 않지만 그는 달랐다. 적

어도 이십여 초가 걸렸다. 요즘 국 씨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

하고 있다. 불편한 몸으로 딱히 할 것이 없으니 일단 자격증이라

도 따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겠나 하고 거기에 매달린 것이다.

 

 이 년 전 일이다. 국 씨는 보습학원에서 운전자로 일했는데 그

만 눈밭에서 학원 차가 미끄러져서 교통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국 씨는 팔다리를 모두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시 마흔

살,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젊은 국 씨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도저

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아내는 절망에 빠졌다.

평생 거동이 불편할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여보, 이제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요. 어서 일어나세요."

 아내는 눈물이 났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눈물이 나왔다.

 "여보, 미안해."

 "아니에요.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런 말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이

렇게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요."

 아내는 또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가 처자식은 굶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나도 하루빨리 일어나도록 노력할게."

 국 씨는 자신의 감정을 속여 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아

내를 위로해 주었다.

 그는 재활 치료에 모든 힘을 다 쏟았다. 그리고 육 개월 안에 퇴

원을 했다. 말이 퇴원이지, 사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 퇴원을 하

게 된 것이다. 국 씨는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

지 못했다. 아내의 도움 없이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 입을 좀더 크게 벌리세요."

 "너무 많아. 조금씩만 줘."

 "많이 먹어야 빨리 건강을 회복할 수 있죠. 자, 아."

 국 씨는 아내가 주는 밥과 반찬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에구, 잘 먹네. 우리 강아지."

 "뭐? 우리 강아지? 하하하."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국 씨와 아내는 부쩍 웃음이 늘었다. 즐

거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웃는 것이었다.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걸 알기에 억지로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웃을 일을 만들었

다. 그 마음을 알기에 국 씨도 더 많이 웃었다.

 "예전에는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왔는데 이제 그럴 일 없으니

까 좋지? 안 그래?"

 "그래요, 좋아요. 평생 이렇게 같이 있을 생각하니까 좋아 죽겠

네요."

 "뭐? 하하하."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국 씨는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여보, 여태 안 잤어요? 새벽 두 시예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다 뭔 일 생기겠어요. 이제 주무세요."

 "지금 내가 잠이 오겠어? 가장의 도리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내

가 합격하면 동네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 거야. 그때는 당신도

날 도와야 해. 알았지?"

 "알았어요. 그러니 어서 자격증이나 따세요."

 "그나저나 당신 직함은 뭐로 하지? 아, 그래. 실장이 좋겠다. 최

실장!"

 "최실장이요?"

 "그래, 내가 전화를 받을 테니까 손님들 오면 집 좀 안내해 줘.

최 실장,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당연하죠. 저 그럼 취직된 거예요?"

 "그래."

 "와, 이제 나도 일하는 여성이구나. 명함도 미리 찍어야겠다."

 "그렇게도 좋아?"

 "그럼요.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부부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

둘은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사랑이 되려고 그들은 일부러 더 크게 웃

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저 멀리, 창밖에서 '메밀묵~! 찹쌀떡~!' 을 외치는 소리가 희미

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정겹던지 둘은 서로 바라보며

작지만 깊은 미소를 보였다.

 

 

 내 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내 발로 걸어서 회

사에 나갈 수 있다는 것, 내 눈으로 책을 보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는 것, 내 귀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당신은 아십니까? 이 세상에는 그 평범한 일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힘들어도 애써 그걸

숨기며 일부러 더 크게 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흔아홉 개의 절망

보다도 단 한 개의 희망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받은, 행복한 오늘을 산다

는 것, 그리고 내일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출처 : 엄마, 정말 미안해(김현태 지음)

 

 

         

           You Raise Me Up-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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