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뒷모습
종현이네 집안은 너무나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낼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종현이는 수강료를 내는 대신, 교실의 칠판 지우는
일을 하며 부족한 과목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종현이는
많은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을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다. 그
리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백묵 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망가진 검은 가방, 그리고 빛이
바랜 옷. 종현이가 가진 것 중에 해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종현이는 책을 살 돈이 필요해서 엄마가
생선 장사를 하는 시장에 갔다. 그러나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뒷모
습을 바라보고,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친친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
의 좌판에 돌아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
시락을 먹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종현이는 눈물을 흘렸다.
종현이는 끝내 엄마를 부르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
리고 그 날 밤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책상에 머리를 부딪치며 하
얗게 밤을 새웠다. 가엾을 엄마를 위해서······.
종현이의 아버지는 종현이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종
현이 엄마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이제껏 두 아들을 힘겹
게 키우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현이의 형은 뇌성마비 장애인이
었다. 웃는 얼굴이 더 무서운 형을 바라볼 때마다, 종현이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형은 장애인이었지만 엄마가 잘 아는 과
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는 일을 했다.
종현이는 엄마와 형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시간
이 흘러 수능시험을 치렀고,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했다.
종현이는 합격통지서를 들고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갔다. 그 날
도 엄마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
다. 종현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예전과 꼭 같은 아픔을 느
꼈지만, 이제는 울며 뒤돌아가지 않고 엄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따뜻한 국물도 없이 차가운 밥을 꾸역꾸역 드시는 엄마의 가난한 어
깨를 뒤에서 힘껏 안았다.
"엄마······.엄마, 나 합격했어······."
종현이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
다. 엄마는 먹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시장 길목에서 한참 동안 종현이를 안아
주었다.
그 날 종현이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 손님들에게 돈도 받지 않고
생선을 모두 내주었다. 뇌성마비로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종현이의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손수레에 종현이를 태웠다. 그
리고 자신의 점퍼까지 벗어 종현이에게 입혀주고, 시장 안의 사람들
에게 자랑을 하며 돌아다녔다. 시퍼렇게 얼어 있는 형의 얼굴에서도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날,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오랜만에 세 식구
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엄마는 그 날의 기쁨과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으로, 국밥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
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했다.
"니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니
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심성은 고우셨던 분이니
까······.사업에 계속 실패하시고 그놈의 가난이 지겨워서 매일 그
렇게 술만 드셨던 거야.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분은 아니셨
어. 그리고 에미로서 할 말은 아니다만,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했겠냐.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야겠다. 가
서 이 기쁜 소식을 알려 드려야지······."
종현이가 어릴 때, 엄마와 아버지는 자주 다퉜다. 종현이 아버
지는 늘 술에 취해서 들어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두
려워 떨고 있는 어린 자식들 앞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를 모질
게 때렸다. 온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날, 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세상
을 저버리고 말았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
만을 남긴 채······.
질척이는 시장 바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드시던 엄마의 가엾은 뒷모습과, 다른 사람
이 뭐라고 욕을 해도 바른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뇌성마비 형의 일그
러진 얼굴은 종현이가 확실한 꿈을 이룰 수 있게 한 아름다운 힘이
되어주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
계신 아버지를 용서하고 일평생 엄마를 힘들게 했던 가난을 아름답
게 보내는 일이라고 종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짐했다.
늦은 밤 돌아오는 버스에서, 종현이는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
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을······."
출처 : 연탄길(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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