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내려다보이는 옥탑 방
가파른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우리 집이 보인다.그 집에서도 우리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산
다. 그렇다. 옥탑 방이다.
여름에는 찜통이요 겨울에는 '냉방 완비'의 추운 곳이 되지만, 이
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라는 길로 가는 전환점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조그만 집에서 나는 전화기 두 대에 팩스, 컴퓨터, 프린터만을 가
지고, 말로만 듣던 제조업과 온라인을 결합한 온 앤드 오프(on and
off) 체제의 인터넷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선택한 이 사
업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은 자본으로 시작하기에
적합했던지라 희망을 안고 첫발을 내딛었다.
하루 종일 집 안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검색으로 업체들을 찾아다니
고, 들어온 주문서에 답장을 하며, 남편의 옛날 거래처 목록이 담긴
빛 바랜 서류 뭉치들을 찾아 거래 제안서를 띄운다. 자본이 워낙 적어
서 적극적으로 마케팅하기는 힘들지만, '희망'이라는 버팀목이 있어
추진력과 인내력을 절대 잃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종일 옥탑 방 안에서 컴퓨터를 상대로 씨름하다 보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고작 나가보는 게 시
장과 옥상이다. 그래서 가끔씩 나를 불러주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목소
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디 아파? 얼굴이 누렇게 떴네. 집 안에만 있으면 우울증 걸려.
사는 게 힘들수록 밖으로 돌아다녀야지, 그럼 안 돼. 차 한잔 같이 하
자. 얼른 내려와."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게 된 집주인 언니의 목소리에선 진한 커피
향 같은 다정함이 느껴진다. 함께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또 집주인 언니와의 이야기 보따리
속에 빠지다 보면, 꼭꼭 담아두었던 내 이야기가 솔솔 나와버린다.
남편은 그날 기절해 버렸다. 외국에 수출했던 물품 대금이 오리무중
이 되고, 50만 달러어치 물품을 가져갔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
진 그날 말이다.
"피눈물난다."는 말이 있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날, 남편 눈에서는 정말로 피가 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잔인한 현실에 맞닥뜨리
게 되었다. 우리는 우선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은행과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모두 쏟아 부었다. 그러나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사
는 남의 손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남편은 밤마다 짐승처럼 울었다.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다"고 했
다. 만일 책임져야 할 처자식만 없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았
을 사람이었다. 그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폭풍이 쓸고 간 폐허처럼, 우리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한밤중에 건장한 청년들이 들이닥쳐 남편을 데리고 갔다. 남편은
날이 밝아서야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 돌아왔다.
남편의 성화에 쫓긴 아이들과 나는, 근처 동생 집으로 피신했다. 그
때 남편은 혼자 남아서 모든 걸 몸으로 막아냈다.
부도 이후, 남편이 겪어야 할 고통은 마치 순서를 정해놓은 것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깊은 상처를 치유할 여유도, 권리도 허용되지 않
았다.
친정 식구들은 남편을 원망했다. "대책도 없이 회사만 키우다가 그
렇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처한 현실처럼 얼음이 굵게 언 어느 추운 날, 우리는
지하 사글셋방으로 옮겨갔다. 짐들이 지하 방 안으로 들어가다 멈추었
고, 짐을 옮기던 사람들은 고개를 내두르다 집 밖에 짐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가버렸다. 지하 방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짐으로 들어
차서 숨이 턱턱 막혔다.
그리고 간신히 밥만 해 먹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부엌에는 환풍기가
없었다. 지하이다 보니 가스 불을 사용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
러웠다. 화장실 배수구를 통해 쥐가 드나들고 방 안으로 물까지 새어
들어왔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방 안 어딘가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기술자랑 같이 와서 보더니 "원인을 모르겠다"면서 방구석에
커다란 구멍만 뚫어놓고 갔다. 그 구멍에는 옹달샘처럼 물이 고여서
날마다 몇 바가지씩 퍼내야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두 달이 넘도록 물이 샘솟는 방, 그곳에서 먹고 자
고 하는 생활도 견딜 수 있었다. 남편만 잘 버텨주면 모든 걸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억울한 기억으로 인해 괴로
워했다. 남편도 인간이었다.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
해 술의 힘을 빌려 억지로 잊고 살았다. 그런 남편을 보고 있으면 물
가에 아이를 내놓은 엄마처럼 언제나 조마조마하고 가슴이 아팠다.
얼마 뒤 석 달이 밀린 은행 연체 이자가 500만 원이 넘었고, 사글셋
방 보즘금마저 압류하겠다는 통고가 날아들었다. 정말로 죽고 싶었다.
어느 날 내 소식을 들은 친구가 찾아왔다. 그리고 누워 있는 내 머
리맡에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올라
가야지."
친구의 말은 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노력하는 만큼 미래는 우리에게 텃밭을 내어줄 것이다.
새 일을 찾아 여기저기 쫓아다니던 남편은 친구와 동업을 시작했고,
나는 미용 기술을 배우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항상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 난 이 집에 사는 게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 그리고 옛날보다
생활하기도 편해. 왠지 알아? 집 안에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잖
아. 봐! 방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화장실 있지, 부엌 있지. 이렇게 편
한데 엄만 이게 싫어?"
내가 미안해할 때마다 아이들은 이렇게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지하
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친구를 전혀 데려오지 않는 큰아이를 보면 마
음이 저렸다.
지하 방에 살면서도 마음만은 편했던 우리는, 결국 방에서 솟아나는
물을 막지 못한 채 장마철을 맞았다. 서둘러 긴급 대피처를 구했고,
지금의 옥탑 방으로 이사했다. 남편은 지하 방에서 옥탑 방까지 전전
한 것이 미안하고 안쓰러웠던지 술까지 끊었다.
이제 더 이상 방 안에서 물이 새는 일도, 쥐가 나타나는 일도 없었
다. 이 작은 변화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뿐만이 아
니었다. 옥탑 방으로 이사해서 좋은 점은 또 얼마나 많은지······.빨
랫줄에 빨래를 반나절만 걸어두어도 눈부신 햇살에 보송보송 기분 좋
게 마른다. 그런 옷가지들을 걷다 보면, 마치 바람결에 퍼지는 박하
향을 맡는 것처럼 상쾌해진다.
"아! 행복하다, 진짜로."
두 팔 벌려 하늘 저 멀리 퍼진 흰 구름을 향해 웃어보기도 한다.
나에게 이 옥탑 방에서 시작한 사업이 있어 정말 행복하다. 이제 밝
은 미래가 우리 가족에게도 팔을 벌리고 있기에.
가끔씩 남편의 일이 난관에 부딪혀 함께 괴로워하다가도 '그래도 행
복해, 행복해, 행복해' 하고 수없이 되뇌다 보면 그 괴로운 마음은 어
디론가 사라진다. 그 대신 행복이 내 손을 잡아주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면, 온 세상에 행복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때로 무너지려는 희망을
목숨처럼 붙들고 살다 보니, 큰 불행에는 마음을 넓히고 조그만 행복
에는 엿가락처럼 길게 늘려 만끽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나 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집주인 언니는 "많은 걸 배운다"면서 "더 좋은 방
을 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비교적 풍요롭던 지난날 만남을 후회한 적도 있었던 우리 부부. 그
러나 가난해진 지금은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가난한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또 아이들
에게 "힘든 세월을 잘 견뎌주고 있어 고맙다"고 말한다. 함께 겪어야
할 어려움이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은
것 같아 마음이 풍족하다.
남편과 나는 가끔 서로에게 다짐한다.
"행여 우리 형편이 좋아지더라도 가난한 지금의 마음을 절대 잊지
말고 살자."
가난한 남편과 가난한 부모를 둔 내 아이들, 그리고 우리에게 사무
실과 살림 공간을 동시에 준 이 작은 옥탑 방. 이 모든 것을 사랑하
는 나는,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문지방을 넘어 나만
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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