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메추리알 있다
야학 수업을 마치고 자장면을 시켜 먹으려고
근처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십 분쯤 지나 야학 계단을 내려오는
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봄날은 간다'를 아주 구성지게 부르고 있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노래가 뚝 끊어지더니 한 사내가 교무실로 들어왔다.
사내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짙은 눈썹에 오지랖이 넓어 보이는 동글동글한 얼굴은
만화 주인공 짱구와 딱 붕어빵이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자장면 시키셨죠?"
"네."
나는 생게망게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자장면 배달을 온 사내 손에는 철가방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번쩍이는 은빛 철가방 대신
검정색 비닐봉지 하나만을 달랑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으으······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다.
그 남자는 해죽해죽 웃으며
검정색 비닐봉지에서 자장면 그릇 하나를 꺼냈다.
할 말이 없었다.
검정색 비닐봉지로 배달된 자장면······.
"맛있게 드시고, 그릇은 그냥 버리세요."
켁! 자장면 그릇 때문에 나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그가 내 앞에 내려놓은 자장면은
스티로폼으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일회용 그릇에 담겨 있었다.
얇디얇은 스티로폼 그릇에 담겨 있던 자장면은
유통기한 지난 우동처럼 팅팅 불어 있었다.
자장면 값을 주머니에 넣고 나서 사내는 마치
첩보영화에 나오는 비밀요원처럼 주위를 살폈다.
나를 완전히 쓰러뜨린 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자장면 양념보다 더 느끼하게 웃음 지으며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다음엔 꼭 짬뽕을 시켜 드시오, 잉.
저희 집은 자장면보다는 짬뽕이 제 맛이지라.
짬뽕이 전문이걸랑요. 크크크."
반죽좋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검정색 비닐봉지에, 왕만두피같이 후들후들한 일회용 그릇······.
팅팅 불은 자장면에, 그것도 모자라
자장면의 맛은 절대 기대하지 말라고
나에게 당부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흠흠한 표정을 지으며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사내의 노랫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힘을 조절하며 나무젓가락의 양팔을 벌렸다.
'뚝' 소리와 함께 나무 부스러기가 하얗게 날렸다.
무지막지한 실패였다.
나무젓가락 하나가 정확히 반쪽만 남았다. 은근히 화가 났다.
국을 쏟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 버린 꼴이었다.
턱없이 짧은 반쪽짜리 젓가락을 간신히 손에 쥐고
팅팅 불은 자장면을 비볐다.
도무지 비벼지지 않았다.
젓가락에 몸을 찔린 면발들은 섞일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덩어리째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군데군데 덩어리진 자장면을 밀가루떡처럼 뜯어 먹었다.
자장면 그릇을 통째로 들어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궁둥이가 자꾸만 딸막딸막거렸다.
그냥 먹자, 배고프니까.
희한했다.
덩어리진 자장면을 씹으며 나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자장면을 배달해 준 사내의 개궂은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얄미웠지만 왠지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짱구를 쏙 빼닮은 그가 한 말이 우스웠다.
"여가기 풀무야학이니께, 공부 가르치는 곳 맞지요, 잉?"
뚜벅 묻는 그의 말에 나는 "네"라고만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디, 나가 우리 마누라 몰래
자장면 속에 메추리알을 네 개나 짱박아 가지고 왔당께요.
많이 드시고 공부 열심히 가르치시오, 잉······.
나가 가방끈은 쪼매 짧아도 공부 중요한 건 잘 알지라."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또다시 느끼한 표정을 지었다.
갠소롬히 눈을 뜨고 목소리까지 잔뜩 깔고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선상님 앞에 있는 자장면이 시방 뭐라고 말하는지 아시요, 잉?"
'내 안에 메추리알 있다······.' 하잖소. 우하하핫······."
면발이 돌돌 뭉쳐진 자장면을 뜯어 먹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의 썰렁한 개그 때문이었다.
거무튀튀한 자장면 속에서
통통한 메추리알이 마술처럼 튀어나올 때마다
그의 말이 생각났다.
'내 안에 메추리알 있다!"
지금도 그가 생각나는 건,
장난기 어린 그의 개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해 준 그의 어머니 이야기 때문이다.
"선상님, 나는 말이요.
사람들이 자장면 좋아하는 속을 모르겄소.
내 코는 자장면 냄새에 절어 그런지
자장면 소리만 들어도 징그럽지라.
허기사, 우리 엄니 살아 계실 때는
엄니 냄새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소.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엄니는 한겨울에도 노상 덥다고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 놓고 지냈지라.
노인네 단단히 노망 든 줄로만 알았지.
그 깊은 속을 누가 알았겄소.
자슥들에게 늙은이 냄새 풍기는 게 죄스러워서
엄니가 한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고 지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것소.
나가 젊을 적,
서울 막 올라와 중국집 주방장 보조일 할 적에
막내아들 보고 싶다고 우리 엄니 이 먼 서울까지 올라왔지라.
변두리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 엄니와 하룻밤을 보내는데
잠결에 우리 엄니 울음소리가 들렸소.
눈을 떠 보니,
주방 보조일 하느라 설거지물에 퉁퉁 불어 버린
아들 손 붙잡고 우리 엄니 서럽게 울고 계셨지라.
그날 우리 엄니 밤새 울었소.
우리 엄니도 참말로 쓰디쓴 세월을 살다가셨지라······."
짱구 아저씨의 눈은 젖어 있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그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라고 했다.
출처 : 보물찾기(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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