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기차 화통 목소리의 비밀

doggya 2010. 11. 27. 21:22

 

 

기차 화통 목소리의 비밀

 

 

 

                    결혼하기 전, 시댁에 인사를 갔을

때였다. 시어머니 되실 분의 목소리에 크게 놀랐고, 이상한 사투리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시어머니는 나와 마주 앉아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

하는데도, 마치 내가 밖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셨다.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TV는 왜 그렇게 크게 틀어놓으시는지, 귀가 따

갑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시어머니가 이렇게 소리치셨다.

 "카이당 위로 가면 스루메 있는데 갖다 먹어라."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 예?"

 "내가 갖다주꾸마."

 시어머니는 답답하셨던지 그 '스루메'라는 걸 직접 가져다주셨다. 알

고 보니 '계단(카이당)'을 올라가서 '오징어(스루메)'를 갖다 먹으라는

말씀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경험도 있는데다 지리적으로 시댁이 있는

부산이 일본과 가깝기도 하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런

일을 겪으니 매우 당황되었다.

 시어머니는 '배추'는 '배차', '조기'는 '조구새끼'라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부산 태생이지만,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언제나 조

용조용 말씀하시고 사투리나 욕을 안 쓰시는 친정 엄마를 떠올리니,

시어머니 되실 분이 낯설기만 했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 배운 게 별로 없나 봐.'

 그날 나는 이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얼마 후 나는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시댁에 갔다. 이

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시댁에 갔더니 형님이 "어머니는 일 나가셨다"고 했다. 그날 처음으

로 시어머니가 공장에 다니시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시어머니는 30여 년 전에 시아버님을 먼저 보내고 홀로

4남매를 키우셨다. 막내인 내 남편이 네 살이었을 때, 시아버님을 보

내고 가진 것 하나 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우자니 일할 곳이 공장밖에

없었단다. 결국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 4남매를 모두 결혼까지 시키셨다.

 형님과 나는 먹을 것을 조금 챙겨 조카들을 데리고 시어머니가 일하

시는 공장에 갔다. 막내아들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도 공장에

나가셨다니 대단한 분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간식을 들고 버스에 오르면서 나름의 기대를 했다.

 '새 며느리가 간식 싸온 걸 보면 모두가 좋아하겠지. 공장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나눠 먹을 거야. 그러면서 모두가 나를 칭찬해 주겠지.

틀림없어.'

 하지만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환상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그 엄청난 소음이라니······.

 우리를 가장 처음 맞이한 것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무시무시한 기

계 소리였다. 쇳소리가 고막으로 파고들어 뇌를 긁는 것만 같았다. 소

름 끼칠 정도로 시끄럽고 기분 나쁜 소리였다. 당연히 사람의 말소리

는 묻혀서 전혀 들리지 않았다.

 형님과 나는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물어물어 시어머니가 일하는 자

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발견했다. 아! 시어머니는 의자도

없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에 쥔 무언가로 열심히 쇠를 문지르고

계셨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몇 번이나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친

뒤에야 고개 들어 우리를 보셨다. 소음을 피해 간신히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이거 수육하고 떡이랑 음료수인데요. 직장 분들하고 드시

라고······."

 그때 형님이 갑자기 시어머니를 와락 껴안았다. 형님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음만 삼키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나도 목이 메었다. 한참을

울다가 겨우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형님도 오늘 처음 와 보신 거예요?"

 "응."

 "엄마, 할머니가 엄마 혼냈어?"

 영문을 모르는 조카들이 형님에게 물었지만, 형님은 집으로 돌아오

는 차 안에서도 계속 눈물만 흘렸다.

 그랬다.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던 이유는, 그리고 TV 볼륨

을 옆사람이 불편할 정도로 높였던 이유는 결코 무식해서가 아니었다.

오랜 직장 생활에서 얻은 난청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압력솥과 냄비

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셨고, 하루 종일 기계 돌리는 소리와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다듬는 소리에 시달린 결과, 소리를 잘 듣지 못하시게 된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시어머님을 함부로 생각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

러웠다. 시어머니에게 "이제 공장일 그만두셔도 될 텐데, 왜 계속 고생

하시느냐?고 철딱서니 없는 말씀을 드린 적도 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나는 몰랐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란 막내아들, 이사

고생 안 시키려고 아파트를 마련해 주시느라 그런 것이었다. 빚까지 내

어가면서 아파트를 장만해 주신 것이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잔업도

마다 않으셨던 걸 우리는 몰랐다. 시어머니가 우리 결혼 후 3년이 지

나서야 그 빚을 다 갚으셨음을 뒤늦게야 알았다.

 "나는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일을 할란다. 그러니 용돈이니 뭐니 갖

다 주질랑 말고 너희나 돈 열심히 모아라."

 시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식 낳고 몇 년 살아보니, 남편 없이 혼자 살아오신 시어머니가 참

으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가 시어머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

까?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친다. 게다가 4남매 모두 반듯하게 공부 마

치고 결혼까지 시킨 걸 보면, 시어머니에게 초능력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경외감마저 든다.

 시어머니는 전화를 자주 하신다.

 "밥 묵나? 안 묵으면 얼른 김치 가지러 온나. 퍼뜩 오니라."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해가 갈수록 더.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