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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납치 사건의 전말

doggya 2010. 11. 29. 07:35

 

공주 납치 사건의 전말

 

 

 

  파마를 하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해

물 칼국수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1시간 후에 다시 오세요."

 미장원 아줌마가 얼룩덜룩 촌스러운 보자기를 머리에 덮어 씌어주면

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미장원을 나선 후 근처 대

형 할인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할인점에 들어서니 호떡집에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엄청나

게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고개를 내밀고 보니 '우유 빨리 마시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 두 분밖에 안 남았으니 빨리빨리 신청하세요."

 행사 진행 요원이 소리쳤다. '좋아!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있겠

어?' 요원의 말을 들은 즉시 출전을 결심했다.

 "꼼짝 말고 여기 서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아이에게 과자 봉지를 쥐어주면서 다짐을 받았다. 그러고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파마 약 냄새를 풍기면서 달려 들어갔다.

 "여기요! 저도 해볼게요."

 예선전 500밀리미터, 거뜬히 마시고 통과. 하지만 결승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마시고 마셨건만, 상품 하나 없는 서러운 4등. 아쉽기만 했

다. '4등이 뭐냐, 4등이.'

 그런데 뭔가가 허전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우리 딸 공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짐까지 받고 서 있으라고 했는데, 그

사이에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공주야~ 공주야~."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 할인점 1, 2, 3층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뱃속에선 1리터 넘게 마신 우유가 출렁출렁

춤을 추었다. 내 뛰는 걸음에 맞춰 위로 출렁, 아래로 출렁, 우유가

'음매' 하면서 입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

인가! 내 딸이 없어졌는데.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안내 방송까지 내보

냈건만, 우리의 귀한 공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가까운 파출소로 냅다 달렸다.

 "아저씨. 우리 애 잃어버렸어요. 빨리 좀 찾아주세요.

으흐흑."

 "아줌마. 일단 진정하시고 여기 앉아요. 애 이름하고 나이는 어떻게

되죠? 그리고 인상착의, 오늘 뭐 입혔어요?"

 "우리 공주가 빨간 원피스에······아니다, 아니다. 청바지에······아니

다, 그것도 아니다. ······노란 멜빵 바지에 재킷을 입었던가? ······아

니다. 체육복인가?"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그 중요한 순간에도 나의 건망증은 여지없

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보세요. 아줌마! 누가 아줌마 딸내미 옷이 뭐 있는가, 그런

거 얘기하라고 했어요? 오늘 뭐 입혔는지 물어보잖아요."

 "그게 생각이 안 나서······."

 "아이 참, 답답하네. 그러면 일단 접수시키고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미아 신고 들어오면 연락 드릴게요. 집 전화번호는 생각나세요?"

 "전화번호가······."

 간신히 머리를 굴려 전화번호를 적고 돌아서는데,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기만 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내 아기 공주는 어

디로 갔단 말인가.

 파출소 문을 열고 나서는데, 경찰관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 생활 10년 만에 저런 아줌마는 처음 본다. 안됐어 정말. 나

이도 젊은 것 같은데, 머리에 저런 거는 왜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야?

참 안됐네."

 사실 나는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수많은 또래 아이

들이 '엄마, 맘마' 배우고 있을 때, 믿거나 말거나, 나는 구구단 줄줄

외웠다. 친구들 짝짜꿍 연습하고 있을 때, 믿거나 말거나, 나는 국어

책 눈감고 읽었다. 그렇다. 나의 어릴 적 별명은 '이신동'이었다.

 그러던 내가 결혼해 큰아들을 낳은 후 이상한 병에 걸린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증세는 대충 이랬다. 아파트 열쇠 주머니

에 넣고 '없어졌다'면서 온 집 안 헤매고 다니기 하루에 한 번, 슈퍼

마켓 계산대 앞에서 옆구리에 껴놓고 지갑 안 가져왔다면서 집에 돌아

오는 일 2, 3일에 한 번, 이런 증세는 둘째 공주를 낳은 후 더 심각

했졌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에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억지

로 깨워 대충 옷 입히고 가방 들려 학교에 보냈다. 잠이 덜 깨어 비

틀비틀 나서는 아들에게 잔소리까지 했다.

 "너는 누구 닮아서 그러니? 아이 참, 늦었네. 지각 안 하려면 빨리

뛰어가. 알았지? 이 잠꾸러기야!"

 그러고 나서 10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다시 돌아왔다. 이 녀석이 현

관문을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팽개치면서 하는 말.

 "엄마! 학교 가니까 애들이 한 명도 없더라. 오늘 일요일이야. 무슨

엄마가 그래?"

 "무슨 헛소리! 오늘이 무슨 일요일이야?"

 큰소리치며 달력을 보니, 일요일 맞았다.

 나의 이런 슬픔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건망증 때문에 손발 고생

하는 것도 억울한데, 아들놈에게까지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너무나

슬펐다.

 어쨌거나 파출소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10분 남짓, 악몽 같은 영

화 서너 편은 찍었다. 주연은 물론 우리 공주였다. 다른 출연자는 모

조리 악당이고.

 

제1편. 가증스러운 유괴범

 우리 공주가 유괴되어 자동차 뒷좌석에 꽁꽁 묶여 떨고 있다. 설마 어

린애를 트렁크에 싣지는 않았겠지. 우리 공주, 무서운 거 엄청 싫어

하는데.. 유괴범들이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하면 어떡하지? 아니다. 이

건 아니지 싶다.

 

제2편. 목격자를 찾습니다.

 혹시 할인점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거 아닌가. 그 나쁜 놈

들이 애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병원에도 안 데려간 게 아닐까. 분명히 목

격자가 있을 거다. 목격자라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아이고,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제3편. 맨홀 속의 공포

 얼마 전에 TV 뉴스 보니까 애가 맨홀에 빠졌다는데, 우리 공주

도 거기에 빠져서 울고 있는 게 아닐까.

 

 

 혼자 재수 없는 영화를 여러 편 찍다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고 눈물

이 앞을 가렸다. 그러다가 제4편을 찍을 때 즈음, 집에 도착했다. 남

편이 현관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온몸의 맥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끝내 남편 옷깃을 잡고 통곡하고야 말았다.

 "자기야 큰일났어. 우리 공주 잃어버렸어. 유괸된 것 같아. 으흐흐

흑."

 그러나 대성통곡하는 내게 날아오는 남편의 거친 목소리.

 "니 죽을래? 지금이 몇 신데 인자 들어와서. 머시라꼬? 우리 공주가

유괴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기가, 응? 그래 내가 유괴범이다. 됐

나? 내가 유괴해 가지고 방에 꽁꽁 묶어놓았다. 됐나?"

 "그게 아니고······진짜로 공주를 잃어버렸다니까. 할인점에서 공주가

없어졌단 말야."

 남편은 그 순간 내 팔을 휙 끌어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방문을

확 열어젖히는 거였다.

 아니!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 몇 시간을 찾아 헤맨 귀한 우리

딸이 바로 이곳, 우리 안방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공주야! 혼자 집에 왔어? 언제 왔는데? 으흐흑."

 뒤이어 날아오는 남편의 고함소리가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렸다.

 "니 진짜 돌대가리 아이가? 그 머리는 또 머꼬? 아직도 머리 덜

됐나?"

 이로써 '공주 유괴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마침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 나는 혼자서

미용실에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용실에서 할인점으로 애를 끌고 다닌

건 또 뭔가? 악!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더니만······.

 아뿔사! 남편의 호통을 듣고서야 머리가 생각났다. 그때서야 머리 속

이 욱신욱신, 화끈화끈······. "아이고, 내 머리야"를 외치면서 미장원

으로 달려갔다.

 그 이후 이야기는 뻔하다. 나는 부시맨이 왔다가 큰절을 하고 갈 만

큼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하고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다.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