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편 거지 아이
양지편이라 불리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조그만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아래에 거지 여러 명이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하며
다녔는데, 어떤 날은 이웃 동네 거지패들과 싸우는 터에 온 동
네가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왕주먹'이라 불리는 거지들의 대장은 험상궂은 얼굴에 포
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왕주먹 근처
에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는 거지들도 하루
가 멀다 하고 왕주먹에게 매를 맞기 일쑤였다.
효순이의 집은 그 양지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루는 효순이가 양지편을 다녀오는데, 다리 위에 거지 아
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숨을 죽
이며 울고 있었다. 머리가 담배연기처럼 헝클어진 아이는 흘러
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연신 닦으며 훌쩍거렸다.
효순이는 그 아이가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울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다. 효순이는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다가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한동안 효순이
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손수건을 낚아챘다. 효순이는 무서워서
얼른 뒤돌아 집을 향해 뛰어갔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효순이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있잖아. 오늘 양지편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거지 아이를 만났거든. 그런데 왕주먹한테 매를 맞았는
지 코피를 흘리고 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손수건을 줬어. 어쩐
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저번에 우리 집에도 왔던 애더라구. 나
잘 했지, 엄마?"
"그래. 우리 효순이 착하구나."
엄마는 효순이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거지들은 정말 불쌍해. 엄마 아빠도 없고, 못된 왕주먹한테
맨날 매만 맞고···."
"그러게 말이다. 가엾은 것들···."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효순이 너도 학교 갈 때 되도록이면 양지편 다리 길로는 다
니지 말라. 혹시라도 그 아이들이 너한테 해코지라도 할지 모
르니까 말이다. 알았지?"
"그럼 멀리 돌아서 가야 하잖아."
"조금 일찍 일어나서 가면 되잖니."
"알았어, 엄마. 그럴게."
"이제 그만 자자."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에 누운 효순이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날 효순이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했
다. 그러고는 엄마가 시킨 대로 양지편 다리 쪽으로 가지 않고
안골 마을 쪽으로 길게 돌아 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양지편 쪽이 아닌 안골 마을 쪽을 택했다.
효순이가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집에 들어서려는데, 사
립문 한켠에 들꽃과 함께 곱게 개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
제 거지 아이에게 건네준 하얀 손수건이었다. 얼룩이 채 지워
지지 않아 분홍빛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손수건 위에는 노란
들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들국화 옆엔 커다란 칡
잎으로 싼 뭉치가 있었다. 칡잎을 펴보니 빨갛게 익은 산딸기
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효순이는 무섭기만 했던 그 아이의 얼
굴을 떠올리며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서쪽 하늘 아래로 엷은 석양이 번져오고
있었다.
가끔 눈을 감고 마음의 창을 열면 더 소중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연탄길4(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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