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언니

doggya 2015. 1. 13. 01:47

언니 / 조세핀 김



내게 언니 분이 계시다. 누구에게나 있는 언니가 있다는 새삼스럽게 얘깃거리가 될까마는 나한텐 그렇다. 나는 무남독녀로 자랐고 집안을 훑어봐도 그 흔한 사촌 언니조차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실 언니는 칠순이 넘었으니 언니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나이 차이지만, 같이 얘기해 보면 느낌은 할머니나 아줌마 보다는 언니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언니로 부르기로 했다.


언니는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동희하고 오랫동안 절친하게 지냈던 분이었다. 인사는 하고 지냈었지만 나하고는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건강을 되찾은 알았던 동희의 병세가 악화되어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매일 왕복시간 반의 거리를 운전해 동희를 찾아가 병원에서 하루종일 동희를 간호했고, 언니는 거의 매일 정성껏 환자가 먹을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오곤 했었다. 그러면서 함께 얘기를 나누는 시간도 늘었고 급격히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언니는 거리를 매일 친구를 간호하러 오는 나의 정성에 놀랐고 또한 거의 매일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오는 언니의 정성에 감동해 서로 다시 보게 것이었다. 처음 언니를 만났을 언니가 국제결혼을 사람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나한테도 왠지 벽으로 느껴졌었다. 어쩐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언니를 더 잘 알게 되고 나서 그것이 나의 편견이었다는 깨닫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많은 20 초반에 중매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하고 얼마 안 있어 법적으로 독신이었던 그에게 7살이나 딸이 있다는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에 분노와 실망은 걷잡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기의 운명이라면 번은 노력을 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새엄마 노릇을 하게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엄마와 딸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아갈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결혼할 때까지 20년을 키워 같이 늙어가는 지금은 친딸과 다름 없다고 한다. 언니 인생의 시련이었다.


자기 아이를 둘을 낳고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미국 이민을 결심한 것이었다. 처음에 남편은 별 기술 없이도 있는 택시 운전을 했고 언니는 여자가 쉽게 접근할 있는 조그만 세탁소를 경영하게 되었단다. 당시에만 해도 시카고의 세탁소 95퍼센트를 한국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접근하기가 그리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삶에 윤활유가 필요했던지 남편은 도박에 손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힘들게 하루 일해서돈을 몽땅 도박판에 잃는 것이 다반사였단다. 그래도 그것은 견딜만했다고 한다. 진짜 힘든 담배 연기 자욱한 도박판에서 담배는 피울 줄도 모르는 남편이 병을 얻은 것이었다. 폐에 문제가 생겨 병원문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치료될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 결국은 폐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 셋을 학교에 보내고 가사를 책임지며 남편의 병간호까지 겹치는 힘든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반을 투병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는 너무나 막막한 현실과 불투명한 장래에 하늘이 내려앉는 같았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조차도 힘에 부쳐 팽개치고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단다. 하지만 아이와 사업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으리라.


이런 언니를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탁소가 있는 건물의 주인이며 언니의 세금보고를 맡아 해주던 앨이었다. 엘은 언니와 다섯살 차이가 나는 노총각이었는데 언니의 힘든 사정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다. 사람은 독일인 회계사로 시카고에 건물을 가지고 있었고 시카고 북쪽의 위스칸신주에 있는 목장에서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언제 부터 언니를 마음에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오랫동안 어려움 중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언니를 지켜 본 사랑이었다.


어느 날 앨이 만나자고 하여 사업 이야기인 줄 알고 나갔는데  끈금없이반지를 주며 청혼을 하더란다. 상상도 못 했던 사람에게서 청혼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50대 후반이 되도록 결혼을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키워야 할 자식도 없었다. 이것이 청혼을 승락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던 언니는 대학에 다니고 있던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자기는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는 그냥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누군가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던 것이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람은 그리 오래 못했다.


무엇엔가 몰두하기 위해서 열심히 소들을 돌보고 텃밭에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 모르고 목장 주위에 있는 나무를 잘라 소에게 주었는데 그걸 먹고 다섯 마리의 소가 한꺼번에 죽어버리는 사고가 생겼단다.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을까. 그래도 식구들은 오히려 언니가 충격 받았을까 고기 많이 먹게 되어서 좋다고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낯설지만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고 적응이 만할 남편이 중풍에 걸린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았으리라.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회복기에 들긴 했지만 여전히 반신불수의 몸인 앨이 언니에게 변호사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더란다. 별 생각 없이 데려다 주었는데 변호사에게 가서 남편이 부탁은 자기의 재산을 몽땅 언니의 이름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단다. 언니도 놀랐지만 변호사는 더 놀랐다고 한다. 그때 언니조차도 언니가 재산만 차지하고 이혼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농담처럼 극구 만류를 했다고 했다. 그때 사람이 했다는 말은 듣는 나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


자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재산이 필요하겠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언니가 떠난다면 자기가 살아야 이유가 없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주머니에 커피 잔을 위한 2달러만 있으면 된다고. 좋아하는 마지막 커피 잔을 마신 생을 마치겠다고. 그런 사람을 두고 떠날 있는짱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언니는 절대로 그렇게 사람이 아니다.


불행은 쌍으로 온다고 했던가? 반신불수의 남편이 겨우 집에서 언니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있게 되었을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이었다. 며느리를 참으로 사랑하고 잘해 주었던 시아버지가 87 때의 일이었다. 몇년을 집에서 환자를 간호하다가 치매 병세가 깊어지자 할수없이 시아버지를 양로원에 보낼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마지막 몇년을 양로원에서 보낸 시아버지가 9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양로원과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남편은 합병증으로 심장 동맥 수술을 , 심장마비를 다섯 그리고 수술 번으로 병원과 요양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그만 체구의 언니가 몸을 움직이는 거구의 남편 차에 싣고 내리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결국 댓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어깨와 그리고 허리에 탈이 것이다. 그러나 언니의 몸을 아끼지 않는 정성어린 간호 덕분으로 앨은 18년을 병상에서 살았고 결혼 생활 23 만에 행복하게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언니는 참으로 힘들어했다. 남편을 죽도록 사랑했다거나 또는 혼자 남게 되어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남편과의 힘든 결혼생활 그리고 18 동안 두번 째 남편의 병간호에 전념했던 언니에게 갑자기 찾아온 자유공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삶을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고 한다. 마치 삶의 이정표를 잃은 거처럼 마음의 갈등과 방황을 것이었다.


그럴 나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위로도 해주고 용기를 주다 보니 차츰 언니도 시간과 함께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볼까, 저것을 볼까,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조금씩 방향으로 길을 잡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얘기를 하면서 언니한테 예술적인 재능이 있다는 발견했다. 정식 교육을 받았다면 훌륭한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쪽으로 보는 것이 어떻겠나 제안을 했다. 언니가 좋아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헝겊을 이용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추천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해 만든 작품이 지난 연말 그룹 전시회에서 팔렸다. 그것도 오백 달러( 오십만 상당)라는 고가에 팔린 것이다. 그때의 언니의 기쁨은 말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저 없는 노인네가 시간우기 취미로 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던 주위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지금은 내년 전시회에 내놓을 작품을 몇 개 구상해서 작업 중에 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있도록 영어 공부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잃고 살았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하지만 있는 노인네로 안주하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지루한 수동적인 삶보다는 언니는 능동적인 것 택했다. 물론 시간은 언니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처음에는 자식들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언니의 용기와 노력이 결실을것이었다. 나는 누가 뭐라하든 하고 싶은 것은 하고야 말겠다는 언니의 고집이 마음에 든다. 이젠 주위 사람들도 전과 다른 눈으로 언니를 보고 자식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용기를 주고 있다.


그래서 언니는 나에게 할머니도 아니고 아줌마가 아닌 멋쟁이 언니로 불리고 있다. 언니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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