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가장된 축복

doggya 2006. 5. 24. 00:14

“얘, 미세스 리가 이번에는 정말 퇴원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되려나 봐.

 

이제나 저네나 하던 시간이 드디어 왔구나그 동안 참 오래 잘 견뎌왔는데…… 그럼 어쩐다지? 지금 서둘러서 간다면, 비록 말 한마디는 건넬 수 없다 해도, 아직 따뜻한 손이라도 잡고 작별의 인사는 할 수는 있을까아니야, 어쩜  장례식에 조차도 늦을지 몰라.

미세스 리가 영원히 우리의 곁은 떠난다는 사실보다도, 그걸 알면서도 얼른 달려갈 수 없는 우리사이의  몇 천 마일이 더 나를 아프게 했다.

 

마음으로부터 생명의 줄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죽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밝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동안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삶에  아무 미련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도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가 아닌, 이제 갓 오십을 넘긴 여자가 자식과 남편을 두고서 홀가분하게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다 됐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미세스 리를 처음 만난 것이 아마도 8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한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숙이의 오래된 지인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아갔다가  해맑은 미소를 띈 미세스 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밝은 미소의 주인공이 그때 이미 4년 전 말기위암선고를 받고 수술에 실패한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놀랬었다. 하나 있는 아들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남편이 오히려 사경을 헤매는 환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미세스 리의 밝은 표정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12년전쯤, 아무리 푹 자고나도 개운하게 풀리지 않는 계속되는 피로감때문에 파김치가 된 채로 보내는 날들이 많아지자, 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친구의 권유로 큰 맘먹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종합검진을 받게 됐다아마도 많이 피로가 쌓였으니 다 잊어버리고 어디 휴가라도 훌쩍 다녀오라고 하겠지하며 며칠 후 아무 생각없이 찾아간 병원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말기 위암으로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면 6개월 정도라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수술을 권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날짜를 잡아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게 되었다. 모든 것이 차갑게만 느껴지는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나올 때는 새사람이 되어서 나오겠지 하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그 차가움을 녹여버릴 수가 있었다그러나 이미 췌장꼬리에까지 퍼져버린 암 세포 때문에 수술은 실패로 끝나고, 그냥 살아있는 날까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하기로 하고는 그냥 덮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는 살아보겠다는 욕심에서 먹기 싫은 한약에, 사람들이 좋다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대면서 얻은 것은 건강보다는 우울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따뜻하게 해가 비치는 창가에 앉아서 새싹이 막 돋는 나무들을 보다가, 얼마를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날 까지는 사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세상에 좋다는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못 먹었던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하고 싶었던 것들그리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살아 보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생활도 점점 활기를 띄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우울증에서도 해방되게 되었다항암치료 중간 중간에는 남편과 여행도 다니고, 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러 다니며, 친구들과의 점심약속에도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열성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뚜기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평화를 느끼게 되었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항상 말하곤 했었다.

운전하고 길을 가면서도 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을 아름다운 나무와 꽃과 하늘을 볼 수가 있었고, 거리에 너부러진 쓰레기도 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으며그 중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고 했다.

아마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아니면 오만한 마음에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으니, 더 풍요로운 삶을 살라고 암이란  질병을 가장한 축복을 하늘이 주었다고 말하는 미세스 리를 보면서, 저렇게 낙관적으로 불행을 받아 들 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축복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도 암은 다섯 번이나 재발을 하면서 항암치료를 받을 때마다 머리가 모두 빠져 버렸지만어디 나갈 때마다 머리 손질을 할 필요가 없이 항상 단정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가발에 감사를 느낀다고  밝은 얼굴로 말하곤 했었다. 미세스 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암세포가 자랄 때마다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곤 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이 되는가보다아직까지 그렇게 혼수상태가 될 정도로, 온몸의 모든 기능이 모두 정지할 정도로 까지는 아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급기야 올 것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적이란 사실 알고 보면 그리 먼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바로 미세스리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내의 생명의 줄을 놓아버릴 수 없었던 남편과, 사는 날까지는 자기 힘으로 자신을 보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환자의 강한 삶에 대한 의지를 받아들인 주치의의 적극적인 치료로 점점 회복세에 들어 퇴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비록 몸에는 여기저기에 호스와 백이 매달려 몸의 많은 기능을 대신해 주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일주일 후,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미세스 리의 집을 찾아 갔을 때,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날들에 대해서 한 시간이상을 쉬지 않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오뚜기에서 불사조로 승격을 시켜주었다.

 

다시 항암치료를 받는 지금도 마지막 가는 날 까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살고 싶은 욕심밖에는 없다고 한다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갈 때를 빼고는 자기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며, 체력이 감당하는 한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노력하고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이 되었을 때, 가슴 아프게 후회하지 않아도 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애를 쓰는 미세스 리가 이번에는 가족을 만나겠다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몇 달 전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간 가족들을 보기위해 이번에는 자기가 한국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세스 리를 이제부터 불사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월간지 문학의 창’ 2006 1월호)

 

            오뚜기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잠시 일본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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