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지구여행과 체험/한국

2,000년만에 찾아 간 나의 뿌리

doggya 2006. 12. 22. 13:18

양산의 내원사를 떠나서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김해시였어요.

조상이 거기 계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의 무지를 다시 한번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또 언제 기회가 올까 싶어서 찾아 가게 되었답니다.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할머니 2,000년만에 손녀딸이 첫인사 드리러 왔어요. ~~

 

 

위의 능 오른쪽에 있는 조그만 보호각은 파사석탑이라고 하대요. 이 안에는...

 

 

6층 석탑이 보관되어 있었어요. 거기 써 있던 글을 참고로 하면 다음과 같아요.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때 풍랑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현재는 부재 6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같은 것이 남아있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신농본초에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였다는데, 김해시의 향도사학자가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이라고도 하며, 원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1873뇬애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따

 

능을 옆으로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조그만 언덕이 나오는데, 그곳을 구지봉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는.....

 

 

이렇게 거북이 머리 모양을 한 바위가 솟아나 있었어요. 거기 써 있던 안내판을 보면 ,

 

구지봉이란 거북이 엎드려 머리를 내민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락의 아홉 촌장들이 이자리에 모여 수로왕 내기를 빌었고, 하늘에선 붉은 줄로 황금알을 내렸다고 한다.

 

바로 이 자리에 김수로왕이 알에서 나왔다는 건국신화를 상징하는 돌로 만든 알이 있었다고 하는데, 간 곳이 없더군요.

그 대신 그 바로 옆에는 옛날 고인돌이 있었어요.

 

 

거기 써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봤어요.

 

고인돌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돌을 쌓은 무덤칸이나 돌판으로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로 큰돌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x 200 x100 cm 롤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구지봉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들을 알 수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유적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3-4세기 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 이란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다시 능쪽으로 내려오면서 그 주위를 둘러싼 산과 동네, 그리고 멀리 아파트가 모두 담겼네요.

 

 

제를 지내는지, 의복까지 다 차려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는 거 같았지만, 알 수가 있어야죠. 아마도 나하고는 오래전에 어디선가 갈라져 나간 사돈의 팔촌에,,, 옆집에... 뒷집에.....

 

 

곁에 있는 부속건물들인데, 아마도 능지기나 또는 문중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 같았어요

 

 

할머니만 보고 간다면 예가 아닐 것 같아서 할아버지 묘에도 인사를 가기로 했지요.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금관가야)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 의 원형 봉토분으로 능석,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등이 갖추어져 있으면, 경내에는 숭성전, 숭안전, 안향각, 신도비각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 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 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년(1580년)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년) 능비를 세웠으면, 고종 15년(1878년)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능의 입구에 써 있던 설명서입니다.

 

 

 

위의 설명에 있는 건물들을 담아 본다고 했는데, 미로같은 곳을 헤매다 보니, 워디가 워딘지.... 도통. 걍 ~ 눈에 띄는대로 찰칵찰칵 !!! ㅎㅎㅎ

 

그런데 그렇게 길 잃은 강아지 마냥 다니다 보니, 우언히 제가 좋아하는 굴뚝을 보게 됐지 뭐예요.

 

 

 

높이는 다르지만 비슷한 공법으로 세워진 굴뚝의 모양이 아주 좋아 보였어요.

 

 

정원에서 이렇게 가을 낙엽과 봄 새싹이 함께 공존하는 나무도 만났지요.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보호차원에서 보수공사를 한 것 같은데, 아주 우스운 모양새를 하고 있더군요.

 

 

차가운 날씨에 철을 앞 당신건지 아니면 찰을 잊은건지 모를 진달래가 피어 있는 것이 아주 반갑웠어요. 진달래 본지가 넘넘 오래 됐거든요. 20년이 넘었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건축물.... 감탄사가 절로 나오대요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까, 가야시대의 생활상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를 지낼때 입는 복장인가 봐요.

 

 

그 당시에 입었던 갑옷이라는데, 조그만 조각들을 이어서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이 없게 만들었다니, 참 놀라운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시에 쓰던 칼들이라고 하네요.

 

 

말을 탈때 이렇게 많은 것들이 부착되는 줄 몰랐어요. 히 ~~~

 

 

한 쪽 구석에 마련된 그 당시의 묘인데  거기 써 있는 설명을 보니까 :

 

가야의 덧널 무덤 - 2세기 후반 경 영남지역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덧널무덤은 방형에 가까운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재나 판재로 덧널을 만들고 관없이 시신과 치레거리(부당품)를 매장하는 구조였다.

4세기가 되면서 부터는 여러가지 부장품과 순장자를 매납하는 딸린덧널이 나타나는데, 이로 보아 사회적으로 계급의 발생과 부의 편중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을 파노라마로 찍었기 때문에 너무 작아서 혹시 관심있으신 분들 보시라고 짧지만 동영상을 올렸으니 참고하세요.

 

 

 

건물밖으로 나오니 앞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지만, 계절이 지나서 인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연못으로 가는 길의 디딤돌은 아주 멋있게 보였어요.
 

 

김해에 온 목적은 다 끝냈고, 배도 고프고 하니 이제 떠날까 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건물이.... 저게 뭐지?

대성동 고분 봑물관이라고 하는군요.

 

 

고분을 지키는 듯 홀로 서 있던 나무가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아 ~~ 이제 어디로 갈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