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피터의 부활

doggya 2007. 9. 11.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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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부활 / 조세핀 김

 

하얀 가운을 입고, 자그마한 아이스박스를 들은 의사가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널싱 스테이션 앞을 지나가자 함께 일하던 간호사와 나는 테이블 위에 준비해 놓았던 하얀 플라스틱 백을 집어들고는 환자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차가운 하얀 시트 밑으로 건장한 청년의 발달된 몸의 실루엣을 그대로 나타내며 침대 하나 만이 뎅그러니 놓여 차가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우린 서로를 마주 쳐다보며 우리가 일이 무엇인지 무언의 대화를 나눈 침대의 양옆으로 각자 가서 섰다.  시트를 걷어 젖히자 양 눈에 하얀 거즈가 붙여진 피터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피터는 21살의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건장한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소방대원이었고, 엄마는 간호사였는데, 어릴 때부터 굉장히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으며,  항상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여름이면 미시간 호수 해변에서 구조대원으로 일하고 틈만 나면 이것저것 자원봉사를 하는 모범적이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눈물을 머금은 엄마가 의식불명인 외아들의 손을 잡고 말이었다. 사고가 나기 얼마 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때문에 시카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기사와 피터의 사진을 적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말없이 차갑게 여기 누워있는 것이다.

 

그해 여름, 미시간 호수 수영장에서의 구조원임무가 끝나자 학교가 개강하기 전까지 친구와 둘이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고 했다. 관심이 없었던 나는 알지 하는  어떤 이슈를 가지고 사람들의 참여 의식을 높이기 위해서 시카고에서부터 서부 쪽으로 다섯 주를 완주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자전거 뒤에다 커다란 깃발을 달고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면서 밝은 미소로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를 하며 출발을 했었다.

 

4 주를 무사히 지나고, 다섯 번째 주에 들어 섰을 함께 갔던 친구가 무릎 관절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근처에 있는 친척집에서 쉬다 시카고로 돌아가겠다고 해서 하는 없이 피터 혼자서 남은 거리를 완주하기로 하고 친구를 뒤로 페달을 밟아 나갔다. 그리고는 후로 며칠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피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길이 없었지만 강한 체력의 피터를 아는 부모들은 별일 없겠거니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없었다고 한다.

 

삼일 후에 인내도 바닥이 나고 불안해 부모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느라 바쁜 중에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시골의 병원에 있는 의사라고 했다.  그리고 전해 말은 피터가 사고를 당해서 지금 코마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같았으리라. 어찌 사연인지도 물을 겨를 없이 그대로 공항으로 나가 아들에게로 날아가면서도 그것이 피터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를 알고  했기를 하느님한테 기도했다고 한다.

 

행여나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병실에 들어서면서 밀려오는 파도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하얀 붕대로 온통 머리를 감싸고 온갖 주사와 호흡 보조기에 매달려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아들 피터였다. 밝은 웃음을 보이며 개학하기 전에 더욱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떠났던 아들이 이젠 한마디, 미소 지을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하나 보기가 어려운 한적한 시골길을 커다란 깃발을 나부끼며 갓길로 페달을 밟던 피터를 뒤에서 오던 트럭이 들이받은 것이었다. 운전자는 피터를 보지 못했다고 우겨 댔고, 졸지 않았고 서야 그런 모습의 피터를 보지 했을 리가 만무라고 모두들 말했지만, 인제 와서 그걸 따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병원에서 달을 지낸 전혀 깨어날 가망이 없다는 의료진의 말을 뒤로 , 아들을 데리고 시카고로 돌아오게 것이었다. 그래도 실낱 같은 기대를 걸고 우수한 뇌수술 팀이 있는 병원이라고 알려진 노스 웨스턴 병원으로 옮겨 번에 걸친 수술을 하게 됐다. 그러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어쩔 없이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 내가 일하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오게 것이었다.

 

격일제로 24시간 일하는 아버지는 이틀에 번씩 와서 침통한 표정으로 아들을 지켜 보고 있었으며, 엄마는 일을 중단하고 24시간을 아들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아들을 위해서 있는 일이라곤 환자를 목욕시킬 조금씩 거드는 이외에는 없었다. 가끔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아들 곁에 누워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목격한 다른 간호사들이 모습을 좋지 않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그게 너무나 의아하게 느껴졌다. 문화의 차이인지, 감정의 차이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달이 지나고, 부모는 아들의 호흡 보조기를 떼기로 마음을 먹고는 담당의사에게 통보를 달라고 요청을 했다. 우린 그때 서류정리를 위한 관례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없었다. 시점에서 이런 질문이 마땅하지 않은 줄은 알지만, 혹시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지 않겠느냐는…… 상황에서 질문 자체가  듣기조차 힘든 거라는 알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없었다. 하루만 생각해 여유를 달라는 부모를 병실로 보내고는 우린 할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다음 , 부부가  널싱 스테이션으로 왔을 ,  그들의 침통한 표정으로 우린 이미 대답이 어떨 것이라는 짐작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들었을 우린 놀라지 않을 없었다. 아들의 몸에서 있는 장기는 모두 기증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린 상황에서 고맙다는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는 알았고, 그렇다고 달리 말도 찾고 그냥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젊었고 건강상태가 좋았던 피터의 몸은 거의 모든 장기를 기증할 있는 상태였다. 다른 장기들은 숨이 멎고 나서 수술실에서 떼어 내면 되지만, 눈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숨이 넘어 바로 병실에서 시술을 하는 것이 통례이고 부모가 병실을 떠나기를 기다려 우린 의사에게 와도 좋다고 알려 주었다.  

 

호흡보조기를 떼어 내기 아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부부는 병실을 떠났다. 마지막 모습은 지켜볼 수가 없다고 했다. 서로의 어깨에 의지하고는 겨우 몸을 추스리고 걸어가는 부부의 지친 뒷모습을 존경하는 마음과 고마운 시선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일상의 업무로 돌아오면서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있었을까?

아니, 자신의 운전 면허증 뒤에 장기기증 승낙서에 아직 사인도 하지 않지 않았는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정을 내린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다.

 

 

계간 '글벗'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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