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불행이 가져다 준 행복

doggya 2009. 8. 21. 06:27

불행이 가져다 준 행복 / 조세핀 김

 

 

행운이나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두 자기의 처지에서 원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내리는 단어의 정의 또한 다를 것이다. 그만큼 그 두 단어는 누구나 다 바라고 또 살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수학공식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공통의 정의가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다른 이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내 나름대로 행운과 행복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볼까 한다.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얻은 일터에서 처음으로 사귄 그리고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친한 친구가 있다. 그런 친구에게 크든 작든 행운이 왔다면 나한테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친구 승희에게 찾아온 행운이란 바로 위암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야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음 순간 초기에 발견한 암이 승희에게 행복을 되찾아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넌 축복 받은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하는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승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느낄 수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특별한 학력이나 기술도 없이 혼자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이곳저곳 직업을 전전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보겠다고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했었다. 외로울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할 때도 승희 쪽에는 나를 포함한 일터의 친구 몇 명 밖에 없을 정도로 혈혈단신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함께 벌어야 하는 이민생활에 아이를 낳고 나니 도와줄 사람 없는 이곳의 생활을 참 힘들어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바로 얼마 전에 대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시던  어머니를 한국에서 모시고 와 함께 살게 되었다. 외동딸을 위해서 집안 살림과 아이는 엄마가  도맡아서 키워주셨고, 그 덕분에 승희는 바깥 일을 안심하고 할 수가 있었으며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수술의 후유증도 없이 날로 건강해지셔서 승희가  밖에 나가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게 든든한 의지가 되어 주셨다.

 

열심히 일 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기반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서 남편 때문에 마음 상하는 불편할 날이 늘어만 갔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남편은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술에 취해 살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 가정에 등한시하는 남편의 몫까지 가정 경제를 혼자 맡아야 했던 승희의 고생은 두 배로 컸었다. 물론 그런 딸을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렇게 뼈를 깎는 고생 중에도 살림은 점점 늘어 교외에 좋은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됐고, 어머니는 마당에다 한국 야채를 가꾸며 고향에 오신 듯 기뻐하셨다. 또한, 아들도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잘 자라 주었고, 공부도 곧잘 해 힘든 엄마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그런 중에도 술에 절어 사는 남편과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다고 나한테 의견을 청해 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 마다 나의 대답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혼이 만연하는 사회라 해도 사춘기의 아들을 두고 이혼이란 그리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다. 고맙게도 승희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힘들어도 참고 잘 견디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간암으로 돌아가시게 되고, 그 어려움 중에 남편은 직장을 고만두고 타 주로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집을 나간 것이었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승희는 다른 생각 없이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늘리는 일에만  마음을 쏟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물질에다 마음을 붙이고 살게 되었다. 쉬는 날도 없이 일에 절어 사는 승희가  안타까워 쉬면서 여행도 다니고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했지만 돈 밖에는 행복을 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과 앞날을 위해서 많이 모아 두어야 한다는 신념은 변 할 줄 몰랐다.

한참을 밖에 나가 살던 남편이 그곳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빈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승희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되찾아 주겠다는 생각에서 서슴지 않고 모아 두었던 돈으로 조그만 사업체를 차려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술에 젖어 사는 날이 많아 음주운전으로 걸려 거액을 주고 변호사를 통해 일을 마무리 짓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아들도 아버지를 무시하며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게 되고 집에서는 물과 기름처럼 가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때 승희가 암 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난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 기회에 남편이 그동안의 잘못을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래서 가족이 다시 가까워지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수술 때 발견한, 생각보다 더 많이 전이가 되어 있던 암에 대한 불투명한 미래와 어려운 항암치료 때문에 자신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승희에게 병을 이기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렇게도 서먹서먹하던 가족들이 가까워지게 되고, 그런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에서 승희는 전에는 못 느꼈던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일 년에 걸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힘들었지만 가족의 사랑으로 지금은 완전히 암에서 해방되어 건강을 다시 찾았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일도 미련없이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시간을 쪼개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면서 평생 느끼지 못 했던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 가끔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항상 욕심이 많아 풍요한 물질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해 왔던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은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 준 암에 감사하며 예전처럼  넉넉하지 않아도 가진 만큼에 만족하며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그래서 이제는 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단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먼 훗날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지 말고 현재와 이 순간, 그리고 나 자신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최고로 즐기는 거야.

 

글벗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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