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의 글들/수필

행복을 위한 준비

doggya 2009. 8. 30. 07:30

행복을 위한 준비 / 조세핀 김

 

 

오늘 참으로 오랜만에 예전에 에이즈 병동에서 함께 일하고 미술 전시회도 함께 했던 동료 간호사 친구를 만났다. 창작활동을 계속해서 하는 줄 알았더니 그 사이에 대학원에 돌아가  벌써 졸업 논문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주제는 전에 함께 일하던 병동의 역사에 대해서 쓰고 있다면서 나한테 인터뷰를 요청했기에 거기 응하면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잠시 그동안 서로 지낸 일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면서 예상치도 않던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건강하게 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지난 동료 몇 사람이 벌써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별안간 세상을 떠났다는 한 동료가 생각났다.

 

한참 전 별안간 엄마가 돌아가신 뒤 2주의 휴가를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 내 자리인 오후 근무 대신 당분간 밤일을 하게 됐었다. 그때 몇 십 년을 밤 당번만 해온, 그래서 밤 터줏대감이라고 까지 불렀던  흐랭키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 바쁘지 않던 어느 날 밤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몇 년 뒤로 다가온 흐랭키의 정년퇴직에 관해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상적인 은퇴연령이 62세지만, 연금을 더 받으려면 65세까지 일 할 수도 있고, 덜 받아도 괜찮다면 56세에도 은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밤일만 하는 관계로 항상 피로에 절어 기운이 없어 보이는 흐랭키에서 물었다. 지금 은퇴를 해도  먹고 살 만한데 왜 일찍 은퇴를 해서 기운이 있을 때 인생을 즐기지 그러냐고 …… 그때 흐랭키의 대답은 간단했다. 은퇴를 하고 나면 연금에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오래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삶이란 있는 거만큼 만족하고 즐기면 되지 더 많이 가지기를 바란다면 욕심을 채우기는 끝이 없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절대로 흐랭키를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 후 난 몇 년 있다가 그 병원을 그만두고 다른 병원으로 옮겼고, 그 후 얼마 있다가 흐랭키는 은퇴해서 밤잠도 원하는 만큼 자고, 편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해 왔던 대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평생 못 했던 남편과의 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랬는데 그렇게 힘들여 모아 놓았던 돈을 제대로 써 보지도, 은퇴 후의 삶을 제대로 즐겨 보지도 못하고 그만 뇌졸증으로 별안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에이즈 병동 이후 옮겨 간 호스피스에서는 전에 보다도 더욱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내 환자 중에 나를 각별히 예뻐해 주던 말기 암 환자가 있었는데, 항상 나만 보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젊고 기운이 있을 때 삶을 즐기라고. 이 환자는 오래전에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은퇴하고 나면 세계여행을 다니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열심히 오버타임을 하면서 쉴 새도 없이 일을 해서 충분한 돈이 모였다고 생각했을 때 드디어 은퇴를 하고 그렇게 벼르던 세계여행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암에 걸린 걸 알게 된 것이었다. 모아 둔 돈의 많은 부분을 치료비로 쓰면서 좋다는 건 다 했으니 병은 점점 더 진전되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혼한 전 부인과 아들이 나타났다. 아마도 그나마 남은 재산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의무적으로 찾아오는 가족들이 잠시 있다가 떠난 다음에 삶이란 허망한 거라고 현재를 맘껏 즐기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서 허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몇 년 후 호스피스 병동을 그만두고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밤일을 하게 됐다. 하루는 내가 일하는 병동에 환자가 별로 없어서 다른 병동에 임시로 가서 일하게 되었는데, 나를 맞아준 간호사는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무서워 접근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아 포기하고 있을 즈음에 수퍼바이저가 순회를 하다가 들렸는데, 그 간호사를 보더니 반갑다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서로 한국사람인 줄 몰랐느냐 면서 인사를 시켜 주는 것이었다. 내 이름으로 내가 한국사람이란 건 알았을 테고 보면, 아마도 내 첫인상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라고 이해를 하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던 그 사람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 뜻밖에도 자신의 처지를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첫 마디가 자기 남편은 자기한테 운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그런 일도 있는 건가?  남편은 엔지니어였는데,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또 둘도 없는 애처가였다고 했다. 그래서 평생을 위험한 운전 한 번 안 해 보고 항상 남편의 보호 속에 출퇴근을 하면서 마치 유리상자 속의 프랑스 인형처럼 곱게만 살았다고 했다.  삼 년을 먼저 은퇴한 남편이 부인에게 평생 계획했던 둘 만의 여행이나 다니면서 남은 생을 즐기자고 일찍 은퇴를 하라고 졸랐지만, 부인은 조금만 더 일하면 연금이 더 나오는데 왜 일찍 하느냐면서 미뤄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남편은 이것저것 여행 준비를 하면서 부인의 뒷바라지를 해 왔고 또 60대 초반의 그는 건강도 좋았다고 했다.

오후반이었던 부인이 점심 식사 후 일 갈 준비를 하는 사이에 언제나처럼 남편은 차에 시동을 걸러 먼저 나갔고 출근 준비를 끝낸 부인이 아무 생각 없이 차고로 가서 발견한 것은 시동도 걸지 못 한 채 차 문 옆에 쓰러져 있는 남편이었던 것이었다. 곧바로 911에 전화를 걸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고 했다. 잠시 후 앰블런스가 왔지만, 병원에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심장마비였다.

그 후 뒤늦게 운전을 배우고, 오랜 세월 동안 사 모았든 아끼든 물건들을 모두 주위에 나누어 주고는 집을 대폭 줄여 일터에서 가까운 조그만 콘도로  이사했다. 이제는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더 벌기 위한 욕심 때문이 아니고 놓쳐 버린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시간은 내가 준비될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자기의 어리석음과 헛된 욕심을 탓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아니 행복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며 산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절대 조건은 무엇일까?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혹시 큰 것을 갖기 위해 준비만 하다가 결국 오늘을 놓쳐 버리는 결과를 가져 오는 일을 지금도 하는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해후는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띠문학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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