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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도

doggya 2010. 10. 27. 07:19

 

 

침묵의 기도

 

 

 

 봄꽃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떼의 여학생들이 교문

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경은이는 교문 앞 진입로에 서서 친구들

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은아, 너도 같이 가자. 혜원이하고 정선이도 다들 간댔어."

 "미안해, 나는 못 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엄마 혼자서 장사

하기가 힘들거든."

 "생일 파티에 너 안 왔다고 명혜 삐질 텐데."

 "명혜한테는 미안하다고 아까 말했어. 그리고 생일 선물도 미

리 줬고."

 경은이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친구들과 헤어졌다. 아픈 마음

으로 집에 돌아온 경은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대뜸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때문에 친구 생일 파티에도 못 갔단 말야. 언제까지 이

과일 가게 할 건데?"

 "···."

 경은이네는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경

은이 아빠는 경은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빠와

함께 했던 과일 가게를 계속 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키웠다.

 경은이 엄마는 언어장애 때문에 과일을 팔 때마다 손님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경은이는 엄마를 위해서 과

일마다 일일이 가격표를 매겨놓았다. 계절마다 그 종류가 다르

고, 크기마다 값이 다른 과일은 가격 변동이 심해서 수시로 가격

표를 쓰는 것도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말 한마디 주고받

지 못하고 엄마 혼자 가격표만으로 장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은 경은이 엄마가 손님에게 내줄 거스름돈을 잘못 계산

해 더 많이 내주었다. 잠시 후 그 사실을 안 경은이 엄마가 앞서

걸어가는 손님에게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맥없이 그냥 돌아와야

만 했다. 수화를 이해할 수 없는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더 많이 내

주었다는 것을 경은이 엄마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엄마의 손짓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

다가 막말을 퍼붓고 가는 일도 있었다.

 "엄마, 다른 장사 하면 안 돼?"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엄마는 깡마른 얼굴에 시름을 가득 담은 채 수화로 대답했다.

 "가격표를 한번 붙이면 두고두고 가격이 변동되지 않는 걸 팔

면 되잖아. 그러면 엄마 혼자서도 물건을 팔 수 있고···."

  "···."

 경은이는 엄마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한동안 말이 없

던 엄마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경은이 손을 잡았다.

 "경은아, 장사는 엄마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엄마하고 꼭 같이 예배봐야 해. 내일은 대입 수험

생들을 위해 특별 예배가 있거든."

 "꼭 같이 가야 하는 거야, 엄마?"

 경은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들은 모두 다 올 거야. 너를 위해 엄마도

꼭 가고 싶거든,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그래."

 경은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의 간절한 청을 저버

릴 수 없었다.

 다음 날 경은이는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갔다. 순서에 따라 예

배가 진행되었고, 마지막 부분에 참석자 모두가 소리내어 기도하

는 시간이 있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대학진학 문제를 놓고

소리내어 간절히 기도했다.

 경은이는 엄마의 조금 떨어져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

고 있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소리내어 기도할 때, 마음

만으로 기도해야 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경은이 마음은 이내 아파

왔다. 불현듯 며칠 전 술 취한 손님이 엄마에게 쏘아붙이듯 남기

고 간 말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경은이는 고개를 돌려서 조금 떨어져 앉은 엄마를 바라보았

다. 그런데 엄마를 바라본 순간 경은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리고 경은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소리내어 기

도할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엄마

는 세찬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두 손을 저으며 말 대신 수화

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엄마였

지만 엄마의 눈물과 땀은 간절한 기도가 되어 빛 바랜 치마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

는 경은이 입에서 신음처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 엄마! 엄마···.'

 

 

 지금의 고난은 머지않아 큰 기쁨을 주겠다는 삶의

눈물겨운 약속이다.

 

 

출처 : 연탄길3(이철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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