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기도
봄꽃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떼의 여학생들이 교문
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경은이는 교문 앞 진입로에 서서 친구들
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은아, 너도 같이 가자. 혜원이하고 정선이도 다들 간댔어."
"미안해, 나는 못 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엄마 혼자서 장사
하기가 힘들거든."
"생일 파티에 너 안 왔다고 명혜 삐질 텐데."
"명혜한테는 미안하다고 아까 말했어. 그리고 생일 선물도 미
리 줬고."
경은이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친구들과 헤어졌다. 아픈 마음
으로 집에 돌아온 경은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대뜸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때문에 친구 생일 파티에도 못 갔단 말야. 언제까지 이
과일 가게 할 건데?"
"···."
경은이네는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경
은이 아빠는 경은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빠와
함께 했던 과일 가게를 계속 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키웠다.
경은이 엄마는 언어장애 때문에 과일을 팔 때마다 손님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경은이는 엄마를 위해서 과
일마다 일일이 가격표를 매겨놓았다. 계절마다 그 종류가 다르
고, 크기마다 값이 다른 과일은 가격 변동이 심해서 수시로 가격
표를 쓰는 것도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말 한마디 주고받
지 못하고 엄마 혼자 가격표만으로 장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은 경은이 엄마가 손님에게 내줄 거스름돈을 잘못 계산
해 더 많이 내주었다. 잠시 후 그 사실을 안 경은이 엄마가 앞서
걸어가는 손님에게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맥없이 그냥 돌아와야
만 했다. 수화를 이해할 수 없는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더 많이 내
주었다는 것을 경은이 엄마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엄마의 손짓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
다가 막말을 퍼붓고 가는 일도 있었다.
"엄마, 다른 장사 하면 안 돼?"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엄마는 깡마른 얼굴에 시름을 가득 담은 채 수화로 대답했다.
"가격표를 한번 붙이면 두고두고 가격이 변동되지 않는 걸 팔
면 되잖아. 그러면 엄마 혼자서도 물건을 팔 수 있고···."
"···."
경은이는 엄마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한동안 말이 없
던 엄마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경은이 손을 잡았다.
"경은아, 장사는 엄마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엄마하고 꼭 같이 예배봐야 해. 내일은 대입 수험
생들을 위해 특별 예배가 있거든."
"꼭 같이 가야 하는 거야, 엄마?"
경은이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들은 모두 다 올 거야. 너를 위해 엄마도
꼭 가고 싶거든,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그래."
경은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의 간절한 청을 저버
릴 수 없었다.
다음 날 경은이는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갔다. 순서에 따라 예
배가 진행되었고, 마지막 부분에 참석자 모두가 소리내어 기도하
는 시간이 있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대학진학 문제를 놓고
소리내어 간절히 기도했다.
경은이는 엄마의 조금 떨어져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
고 있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소리내어 기도할 때, 마음
만으로 기도해야 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경은이 마음은 이내 아파
왔다. 불현듯 며칠 전 술 취한 손님이 엄마에게 쏘아붙이듯 남기
고 간 말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경은이는 고개를 돌려서 조금 떨어져 앉은 엄마를 바라보았
다. 그런데 엄마를 바라본 순간 경은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리고 경은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는 소리내어 기
도할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엄마
는 세찬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두 손을 저으며 말 대신 수화
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엄마였
지만 엄마의 눈물과 땀은 간절한 기도가 되어 빛 바랜 치마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
는 경은이 입에서 신음처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 엄마! 엄마···.'
지금의 고난은 머지않아 큰 기쁨을 주겠다는 삶의
눈물겨운 약속이다.
출처 : 연탄길3(이철환 글)
'사랑방 > 햇살님의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 내복' (0) | 2010.10.29 |
---|---|
'부침개'와 '촐랑방구' (0) | 2010.10.28 |
눈 치우는 할아버지 (0) | 2010.10.26 |
선생님의 눈물 (0) | 2010.10.25 |
해바라기 아저씨 (0) | 2010.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