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햇살님의 좋은 글

잊어서는 안 될 얼굴 하나

doggya 2010. 11. 12. 08:37

 

 

잊어서는 안 될 얼굴 하나

 

 

 

 "내 이것들을 당장!"

 "그래, 맘대로 해봐라. 맘대로!"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었다. 내 나이 아홉 살. 그때까지 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었던 나는,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너무도 가난한 우리 집.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아껴주고 사

랑한다'는 이야기는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엄

마는 서로 할퀴고 상처 주는 데 열심이었다. 아버지는 폭언을 일삼으

며 매질을 했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팔을 물어뜯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엄마가 나가떨어졌다. 엄마가 땅바닥에 쓰러져 울부

짖으면 우리도 따라서 서럽게 울어댔다.

 아버지의 술버릇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술만 드셨다 하면 매

타작이었고, 매질하지 않은 날에는 식구들을 못 자게 괴롭혔다. 그러

나 이상하게도 다음날 술이 깨고 나면, 당신이 간밤에 어떤 일을 저질

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짐을 챙겼다. 그러고는 장

롱 속에 깊어 넣어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엄마, 안 돼! 우리랑 같이 가. 같이 가잔 말이야."

언니와 내가 발을 잡고 매달렸지만 엄마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곧 돌아올 테니까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 알았지?"

 엄마는 언니에게 신신당부를 한 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저녁이 되자 언니는 부엌 구석을 뒤적이더니 밥상을 차렸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계란찜을 해주고는 자기는 먹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도 우리는 무서울 뿐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엄마가 집을 나간 사실을 안다면······.'

생각만 해도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언니와 나는 잠들어 있는 동생 옆에서 난생 처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제발 오늘만큼은 아버지가 술을 안 드시고 오게 해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소원을 빈 게 무색할 정도로 술이 떡이 될 정도로

취해 돌아오셨다. 멀리서 술 취한 아버지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언니는 무언가 짐작이라도 한 듯이 동생과 내게 주섬주섬 옷을

입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리고 불규칙적인 발소

리가 지척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방 안에 웅크린 우리를 노려보고 섰

다. 아버지의 모습은 사람 같지 않았다. 잔뜩 풀어진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악!"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의 손에 커다란 몽둥이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커다란 몽둥이를 치켜들더니 순신간에 방문을 향해 내려쳤

다. 방문이 우리의 비명과 함께 힘없이 조각나고 말았다.

 "내 이것들을······."

 아버지가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언니가 우리 둘을 구석으로 밀며 자기 몸으로 감싸 안았다.

 "으악!"

 언니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의 무

자비한 몽둥이가 그대로 언니 등을 후려친 것이었다.

 언니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언니의 등

을 그렇게 후려치기를 몇 차례. 그러다가 지쳐버린 아버지는 방바닥에

그래로 쓰러졌다.

 언니는 끙끙 하는 신음을 내면서도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도망쳐 나

왔다. 아버지가 다시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한 채 무작정 집에서 나왔다.

그나마 이렇게 도망치게 될 줄 알았던 언니가 우리에게 옷을 미리 입혀

주었던 게 다행이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집을 바라보면서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언니

의 작은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설핏 잠이 들었다.

 언니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난장판이 된 집 안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그 뒤로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밤마다 도망을 쳤고, 아버지

는 부지깽이에 빨랫방망이까지 들고 우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짓말처럼 엄마가 우리 앞에 나타

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 이제는 어디 안 갈 거지? 응?"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었다.

 엄마가 돌아오고 나서, 우리 집은 한동안 평화로웠다. 두 가지만 빼

고 말이다. 하나는 그 양만 줄었을 뿐 아버지가 술을 드신다는

것, 또 하나는 엄마가 언니와 다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몇 년 후 언니는 엄마가 반대하는 사람과 기어코 결혼을 하고 말았

다. 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언니는 이혼을 했

고, 어렵게 얻은 딸이 다섯 살 되던 해, 불현듯 성공해 보겠다면서 우

리 곁을 떠났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지금까지 전화만 두어 통 왔

을 뿐, 감감무소식이다.

 어느 덧 언니의 딸은 잘 자라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며칠 전,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얘, 네 언니 딸이 학교에서 반장으로 뽑혔다. 신기하지? 고것이 제

엄마를 닮아서 여간 똑똑한 게 아니거든."

 지난 여름방학 때 조카가 우리 집에 머물다 갔다. 어느 날 그 애가

세수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좀처럼 나오지 않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큰이모, 왜 그런 줄 아세요? 모르시죠?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싶

을 때만 그래요. 세수할 때 울면 할머니도 내가 운 걸 전혀 눈치 못

채시거든요."

 기가 막혔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니······.그

애를 가슴에 꼭 안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니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까? 그 옛날, 우리가 집 나간 엄마

를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언니는 알고 있을까? 그 옛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더 사무치게 가슴 졸이며 언니를 그리워하는 어

린 딸이 있다는 걸.

 자꾸만 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바보같이······.결코 잊어서

도, 잊을 수도 없는 그리운 얼굴인데 말이다.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