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장수 친구의 행복 메시지
"한번······드셔······보세요."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 한 마디 하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몇 사람이 다가왔지만, 집어먹기만 하고 사 가지는 않았다. 얄
밉기만 했다.
나는 친구 소개로 어묵 회사 판촉 요원 일을 하고 있었다.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서 어묵을 끓여 시식 판매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사
실, 그 일을 처음 시작한 나는, 정작 어묵 파는 일보다 다른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만저만 망신스러운 게 아닐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시식 코너를 지켰다. 이 백화점은 동
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여기까지
물건을 사러 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제 며칠간만 바짝 일을 하
면 큰애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를 사줄 수 있
다는 기대감으로 애써 그런 불길한 생각을 털어냈다.
하지만 그 일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잠깐 주어지는 식사시간 빼
고는 하루 종일 잠시도 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묵을 끓이면서 손
님들에게 구매를 권유하는 일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회 생활
의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숙맥이 그런일을 맡았으니 어떻겠는가.
저녁 무렵이 되어가니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용기도 좀 생겼다. 어
묵을 권하면서 요령껏 제품을 설명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저 먼발치에서 여고 동
창 둘이서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수다를 떨면서 쇼핑 카트
를 밀던 그 애들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앗! 큰일이다. 이걸 어쩌나······.'
너무나 당황해 안절부절못해하던 나는 그만 화장실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자꾸 그 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눈에도
부유해 보였다. 둘다 시집을 잘 갔는지 족히 몇 백만 원은 되어 보
이는 밍크 코트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있었다.
'저 애들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내 고교 시절 별명은 '수학 귀신'이었다. 수학을 잘해 교내는 물론
교외 수학경시대회까지 나가 입상을 하고 해서 친구들에세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친구들과 비교해 보고 있으니 내 처지가 한심하기만 했다. 자꾸
만 눈물이 났다. 사는 게 대체 뭐란 말이냐!
한참을 울다가 시식 코너로 돌아오보니 어묵 국물이 다 졸아 있었다.
때마침 찾아온 어묵 회사 직원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돈 버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편이 가져다 주는
월급을 "겨우 요거?" 하면서 우습게 여겼던 게 후회가 되었다. 남편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때마다 나는 이렇게 큰소리 치곤 했다.
"그까짓 돈. 내가 맘만 먹으면 한 번에 몇 뭉치는 벌 수 있어! 몇
푼 안 되는 월급 받아오면서 생색은 무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오로지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골목길을 들어서는 찰나 트
럭에서 누군가가 소리친다.
"갈치요, 갈치. 갈치가 싸요!"
한 아주머니가 트럭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저 여자 처지도 나처럼 안됐네. 그래, 갈치라도 한 마리 팔아주자.'
이렇게 생각하고 다가가서 갈치를 살펴보았다.
"어머머! 이게 누구야? 너 혹시 경숙이 아니니?"
갑자기 갈치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미 해가 저문 뒤라 얼핏 봤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들여다보니까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그 애는 학교 때 학생회장을 지낼 만큼 성적
도 좋았고 미모도 받쳐줘서 주변 학교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무척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갈치 장수가
된 모습에 너무나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자신이 왜 갈치 장수로 나서
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주었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천연
덕스럽게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어떡하니? 먹고는 살아야겠고······.애들도 가르쳐야 하니까······.뭐
어떻게든 다 살게 되더라고. 하하하. 나 잘 어울리지? 하하하."
"그럼, 얘! 사람 사는데 할 일 못할 일이 어디 있니? 도둑질만 빼
고."
나는 그렇게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속으로는 창피했다. 백화점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도 도둑질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양 도망쳤던 나, 갈
치 장사를 하면서도 구김 없이 살아가는 저 친구······.
학생회장에 미스코리아 뺨 치는 외모를 지녔던 저 애도 저렇게 자신
있게 생선 장사를 하는데, 그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는 이게 뭐란
말인가. 겨우 판촉 행사 하루 하고서는 세상 다 산 것처럼 서글퍼 하
다니. 그렇게 그녀는 내게 스승이 되어주었다.
나는 요즘도 가끔 판촉 행사에 나가곤 한다. 그럴 때면 동네 아주머
니들에게 너스레를 떨며 당당하게 말한다.
"와서 물건 많이 팔아줘서 내 체면 좀 세워줘요. 응?"
그 친구가 너무나 고맙다.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자신 있게 살아가는 방법 말이다.
행복이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 같은 요행
은 아닌 것 같다. 하나씩 하나씩 노력해서 무언가를 쌓아가는 동안 느
낄 수 있는 감정,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출처 : 곁에 있어 고마워요(김경숙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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