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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 앞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doggya 2011. 4. 14. 09:54

나는 타인 앞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뒤꿈치를 하늘

로 들고 걸어가는 것 같다. 사실 사람은 발바닥을 모두 땅에 딛게

끔 되어 있는데, 하이힐은 뒤꿈치를 하늘로 올리고, 발가락만 땅에

딛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왜 이런 불편한 디자인의 신발이 나왔을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

었는데, 언젠가《야생동물 흔적 도감》이라는 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모든 동물의 종은 발 모양이 모두 다르며, 따라

서 발자국만으로도 어떤 동물의 것인지 대부분 알 수 있다. 그래서

산이나 들에 찍힌 동물의 발작국만 보고도 어떤 짐승이 지나갔는

지, 지나간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다.

 

 

 '뒤꿈치를 들고 달리면 다리 길이가 길어져 보폭이 커지고, 땅

에 닿는 발 면적이 줄어들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나아가 개처럼

발가락만으로 걸으면 다리 길이가 더 길어지고, 사슴처럼 발가락

끝에 달린 발굽으로 걸어면 다리 길이가 더 길어진다. 오소리와

곰은 발가락 다섯 개를 모두 쓰기 때문에 다리가 짧고 빨리 달리지

못한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를 보고 곰이나 오소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신 노루나 사슴 같은 늘씬한 다리를 연상하게

된다. 하이힐은 자신의 다리를 노루처럼 길게 보이게 하려는 여성

의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적 디자인이다.

 그리고 여러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다닌 필자들의 글을 보면

서, 사람 역시 이러한 다양한 동물의 발자국처럼 어떤 흔적들을 남

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업적이나 명

성 같은 위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사로운 일상에서도 그 사람이 있

었던 자리를 짐작하게 하는 흔적들이 있다.

 

 

 향수의 향기를 남긴 사람, 팥빙수를 먹은 흔적을 남긴 사람, 남

길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간혹 옷가지 등에 아예 그 흔적을 묻혀

오기도 하고, 깔끔하게 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그 흔적만으로도 한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무리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죄자들도 반드시 어떤 흔적

을 남긴다고 법의학자들은 설명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알게 모르

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나를 평가하

기도, 혹은 평가받기도 한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흔적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것은 그림자

처럼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살면서 좋은

흔적만을 남길 수는 없겠지만, 간혹 나쁜 흔적을 남겼다면 깨끗한

행주나 걸레로 닦아내려는 시도, 그 마음 자체가 중요하겠다. 당신

이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면 반드시 그 흔적이 노루의 발자국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지난 겨울에 깊은 산속 눈 위에 찍힌 짐승발자국 같

은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마음에 봄이 오지 않아 그 발자국은

아직도 얼어붙어 있다. 자연의 순조로운 흐름처럼 봄이 오면 눈이

녹아야 할 텐데, 어떤 이의 마음은 어느 순간 얼어 붙어버린 채 평

생을 가기도 한다.

 장마철이 되어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보면서 그 사람은 또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창문을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창으로 폭우가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더욱 마음의

벽을 세차게 두드리는 듯했다. 발가벗고 저 폭우 속으로 뛰어 들어

가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불길 속이라도 들어

갈 텐데, 하는 마음뿐이었다.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 세워둔 우산을

고는 그는 거리로 나섰다.

 

 

 그의 외동아들이 실종되어버린 건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아무

런 소식도 없고,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아들은 마치 고요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후 수년간 그와 가족들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

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의 어깨 한 쪽을 비가

적시는데도 그는 우산을 기우뚱하게 들고 계속 거리를 걸었다. 간

혹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

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쇼핑센터 앞을 지나, 목욕탕이 있는 골목

길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어두운 계단의 한 귀퉁이에서 어린 아

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나오려다가 이내 쏟아지는

비를 보며 두려운 듯 다시 들어가서 울고 있었다.

 

 

 덫에 걸린 짐승에게 다가가듯이 조심스럽게 그 사람은 아이에

게 다가갔다. 그러곤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처

음엔 경계하던 아이는 서서히 눈빛이 풀리면서, 공원에 놀러 왔다

가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아이를 근처의

햄버거 가게로 데리고 가 우선 아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그때

햄버거 가게 창문 밖으로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거리를 헤매는 멀

쩡한 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햄버거와 우유를 먹어대

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 정

처 없이 헤매는 그 여인을 붙잡았다.

 

 

 두 모자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속

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 고통을 알기에 내가 더 고맙

습니다, 라고.

 그는 다시 우산을 쓰고 사무실 입구에 있는 횡단보도에 서서 생

각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비가 나의 모든 나쁜 흔적을 지워

버릴 것이라고, 어쩌면 내일이라도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잇을 것이

라고 되뇌었다. 그러자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초록불이 밝게 들어

왔다. 서둘러 길을 건너는 인파 속으로 그 또한 발걸음을 옮겼다.

 

 

 

비와 눈의 가장 큰 차이가 무얼까. 둘 다 물방울이지만 기온

에 따라 각자 다른 모양새를 갖고 있다. 비와 눈의 차이점은 투명

한 것과 흰 것, 혹은 흘러내리는 것과 내려 쌓이는 것, 여름과 겨울

처럼 금방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눈은 사람의 발자국을 남기고,

비는 그것을 지우는 것이라고 한다. 즉 흔적을 남기고 지우는 것인

데, 그 흔적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바람일지라도 어떤 실체

가 지나간 자리이다.

 머문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떠난 자리에

는 항상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는다. 타인 앞에 좋은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출처 : 착한 책(윤재훈 지음)